장벽 너머의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다!
1984년. 서독의 어느 작은 도시에 사는 평범한 고등학생 카티야에게 한 살 위의 새 남자친구가 생겼다. 하지만 그들은 또래들처럼 평범한 데이트를 하는 것이 불가능한 커플이다. 왜냐하면 첫눈에 반한 남자친구 마르쿠스는 동베를린에 살고, 그것은 그들 사이에 그 유명한 베를린장벽이 가로놓여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심상치 않은 이들의 관계, 과연 무난하게 지속될 수 있을까?

냉전에 대한 짧은 기억
많이 알지는 못한다. 소련이 한 발 앞서 가가린을 대기권 밖으로 올려 보내자 미국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고, 둘의 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 쿠바가 미사일 한 방에 날아갈 뻔하기도 했다.
스파이 활동 전력을 가진 작가 존 르카레가 1963년에 발표한 소설도 하나 떠오른다. ‘자신이 구축해놓은 독일 첩보망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한 한 영국정보부 요원이 상부로부터 이를 동독정보부 실세를 제거할 기회로 삼을 것을 지시받는다. 이에 그는 영락한 요원을 연기하며 적의 접선을 기다리고……’ 동독에 심어둔 정보원을 잃은 그를 향해 관리관은 이런 말을 던진다.
“(……)기분을 말로 표현해야 한다는 느낌이 들면 안 돼.”
80년대 말 ‘황금의 서쪽’과 대화하느라 바쁜 고르바초프가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조금만 더 나아가면 뭔가가 이루어질 듯한 긴장 내지는 기대로 점철돼 있던 시절. 그것은 냉전이란 방대한 드라마의 마지막 시즌이었으며, 그 끝에서 몇 번째쯤 에피소드에 ‘독일 통일’이 놓인다.

어떤 터닝 포인트
히로인에게로 돌아가자. 카티야는 동서 청소년 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베를린 견학을 가게 된다. ‘재미있어 보이고, 참가비가 쌌기 때문’이라는 게 주된 신청 이유였지만,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라 했던가. 서베를린부터 둘러보고 동베를린을 방문한 첫 날, 카티야는 ‘대안적’ 분위기를 마구 뿜어대는 마르쿠스에게 반하고 만다. 마르쿠스 역시 같은 마음임이 확인되면서 이들의 연애는 순조로운 출발을 보인다. 프로그램이 끝나던 날, 참가자들은 편지를 주고받자며 주소를 교환하고, 두 사람 또한 서로의 주소를 챙기는 걸 잊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서독 아이들, 특히 카티야를 떠나보낸 뒤 찾아든 상실감을 주체할 길 없는 마르쿠스가 처음으로 ‘장벽’이란 존재를 심각한 장애물로 여기게 된 것이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더라면!”하고 후회한들 소용없는 일. 사람 마음에 명령은 불가능하며 우린 언제 어디서 누구와 사랑에 빠지겠노라고 스스로를 조종할 수 없는 존재이지 않은가.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과 아예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과의 차이는 극명한 법. 이후 이들이 주고받는 편지에서 우리는 장벽에 대한 원망, 탈출 가능성 타진 등의 내용과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된다. 분단에 대한 보편적 경험이 개인의 일상 안으로 들어오면서 그 허울 좋은 이념이 갈라놓은 것이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라는 지도상의 구획만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의 상황을 생각해본다
책 속에는 흥미로운 장면이 많다. 견학 프로그램에 참여한 학생들끼리 자국 현대사에 대해 의견과 지식을 주고받는 장면은 ‘역사의식?역사인식’의 중요성, 공교육 프로그램의 중요성 따위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2008년의 우리에겐 충분히 고무적이다. 물론 80년대를, 그것도 독일에서 겪어낸 청소년들과 지금의 한국 젊은 세대를 비교하는 것은 ‘페어플레이’가 되기엔 힘든 요소가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말이다.
본문의 ‘건포도폭격기’가 언급되는 부분에서 설명되는, 동독정부 수립 이후 장벽이 세워지기까지의 동서 교류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같은 분단국가로서 확실히 부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더불어 출발지점이 다르기에 결말도 다르지 않을까 싶은, 안타까움 역시 찾아든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
이 책은 소설이면서 소설이 아니다. 작가가 서두에서 ‘자전적’ 이야기임을 밝히고 있는데다 주인공의 이름 역시 동일해, 독자는 작가와 작중화자를 결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이 현실을 모방하느냐 그 반대냐, 하는 논쟁을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때로는 픽션을 압도하는 극적 전개를 보여주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아닌가. 따라서 독자는 픽션이 제공하는 특수한 상황에 감정을 이입하듯, 카티야의 공간적?심리적 궤적을 따라가게 된다.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출하고 환경보호에도 민감한 카티야지만, 어쨌거나 여느 10대와 다름없는 감정의 기복을 보이고, 때로는 철딱서니 없기도 하다. 어떤 문제에 있어서는 실행까지 나아가는 데 거침이 없다가도 또 다른 문제를 대할 때는 순진한 발상에서 그치고 마는, 딱 그 정도의 불완전함. 다소 기우뚱한 자세로 걸음을 옮기는 영락없는 10대의 모습을 우리는 카티야에게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한국 독자들에게 ‘카티야’란 캐릭터가 설득력을 갖는 힘이기도 하다.

베를린, 확실히 매력적인 그곳
1963년 베를린장벽이 세워지고 2년 뒤, 베를린을 찾은 서방측 대표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자유로운 사람들은 그들이 어디에 살건 모두 베를린 시민입니다. 나 역시 그런 자유로운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 자부심을 갖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히 빈 아인 베를리너’(Ich bin ein Berliner: 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
냉전의 각축장, 동서 화해의 주무대 등의 소재가 아니더라도 소설 속에서 언뜻언뜻 모습을 드러내는 대안문화 및 참여예술 근거지로서의 베를린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파리가 아방가르드하다면 베를린은 확실히 현실 참여적 성격이 배어 있다. 일찍이 환경문제와 예술을 접목시킨 것―물론 소설에서는 짧게 언급되지만―도 그렇고, 푸리에의 공상적 사회주의를 연상시키는 공동생활도 그렇고……. 베를린에서는 혼자 돌아다니기보다는 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뭔가를 배우거나 뭔가를 가르쳐주는 실질적인 활동을 해야 할 것만 같다. 참여의식을 자극하는, 요즘 말로 왠지 모를 ‘강한 포스’가 느껴진다는 의미다.
‘보리수나무 아래’ 란 뜻을 가진 운터 덴 린덴가를 거닐다 프리드리히가로 방향을 바꾸고, 알렉산더광장을 거쳐 동물원역까지 가보는 것도 좋겠다. 독일의 ‘정신’을 구현한 작가와 화가도 꽤 등장하는데, 이들의 작품을 찾아보는 독서 후반 작업이 이어진다면 그것 역시 그 나름대로 재미있을 듯싶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클라우스 마이네(그룹 ‘스콜피온스’의 보컬)의 애잔한 휘파람을 앞세워 「Wind of Change」의 그 유명한 전주가 흘러나올 때면 베를린 포츠담광장, 장벽으로 기어 올라가는 사람들, 무너진 장벽 앞에서 얼싸안은 채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연속 편집된 화면으로 머릿속에 점멸한다.
“나를 데려가줘요, 감격스럽던 밤, 그 순간의 마법 속으로……”
예의 검은 베레모를 쓴 마이네와 멤버들이 모스크바 크레믈린궁전 앞을 웃음 띤 얼굴로 걸어간다. 냉전은 그렇게 제 수명을 다했다. 그리고 카티야와 마르쿠스는 마침내 다시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