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까지 함께할 단 하나의 사랑 이야기…

이 책은 37년 전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한 김한규 씨의 실화소설이다.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여인을 만났으나 주변의 심한 반대에 부딪치며 심한 가슴앓이를 한 그는, 한편으론 어머니를 돌보고 많은 동생들을 거둬야 하는 한 집안의 장남이자 가장이었다. 공항에서 구리반지 하나씩 나눠 끼고 조촐한 결혼식을 올린 그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사고무친의 미국 땅에서 자리 잡고 성공하기 위해 그가 얼마나 열심히, 부지런하게 살아 왔는가를 이 책은 사실 그대로,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예고 없이 죽음의 그림자가 들이닥쳤다. 간암에다 폐암까지 겹친 것이었다. 평생을 일에 파묻혀 지내온 그가 병마로 인해 예순두 살에 일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보니 죽음이 닥쳐온다는 두려움 속에서도 가슴속이 텅 빈 듯 허탈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들을 정리해 딸들에게 들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힘겨운 투병 생활 중에도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머릿속의 생각들을 써내려갔다. 아무래도 적당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아 애태우기도 수없이 하면서 지난날의 이야기들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런 그가 지금 2008년 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5년 전, 의사들은 입을 모아 그에게 남은 생명이 고작 3개월에 불과하다했지만, 어둡고도 긴 터널을 통과한 그는 치명적이고도 위험한 고비들을 넘기면서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병상에서 영혼의 힘을 다해 써내려온 실화소설 <구리반지> 출간을 운명처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금이 간 담벼락 틈을 뚫고 봄의 왕성한 생명력은 꽃을 피워낸다. 가뭄이 들어 메마른 잡초로 덮인 광야 저 아래에도 분명 한 줄기 샘물이 흐르고 있음이다. 그는 <구리반지> 출간과 함께 이제 새롭게 태어나는 심정으로 2009년의 희망찬 봄날을 설계하고자 한다.
서로의 마음이 뭉쳐진 ‘사랑’의 힘은 개개인의 능력을 넘어서 위대하고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한국의 독자들과도 함께 나누고 싶다. 사람이 세상에 나서 한 생을 살아가는 동안 아픔 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다만 하늘이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한 그날까지 보람된 인생을 살다 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인간의 길’이라 믿는다.


작가 인터뷰 INTERVIEW QUESTIONNAIRE

1. 아내와의 첫 만남 당시의 느낌?
아내를 처음 보는 순간 나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취해 벼락에 얻어맞은 듯 정신을 잃을 뻔했다. 내가 항상 마음속에 그려왔던 아름다운 여인이 내 앞에 섰을 때 그녀가 어떤 여자인지 알기도 전에 나의 마음은 그녀에게로 이미 달려가고 있었다. 당시의 내 나이 스물여섯, 일곱 어린 동생들을 먹여 살려야만 하는 총각 가장으로 이미 모든 여자들로부터 남편감으로는 외면당하고 있을 때였다. 불같이 타 오르던 모든 희망과 포부를 소용돌이치는 강물에 집어던지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색소폰을 불며 밤무대에서 일하며 낮에는 국민학교 선생으로 일할 때였다. 나로서는 꿈에서도 생각할 수 없는 그녀에게 향한 나의 마음까지도 애써 지우려고 무척 노력했었다. 보잘것없는 내가 그녀를 마음속으로 그리워한다는 자체까지도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나의 비참한 형편을 원망했었다.
그녀를 거의 잊어가고 마음이 안정되어 갈 무렵 뜻하지 않은 일로 다시 만나게 되면서 결합이 이루어져서는 안 되리라 생각한 우리 사이에 새로운 운명이 시작되었다.

2. 미국 이민을 결심할 당시의 심정, 각오?
총각이 두 아이들 딸린 이혼녀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펄쩍 뛰고 반대를 하는 1960년대의 한국 사회 고질적인 풍습에 맞서 이길 자신이 없었다. 너무도 무자비하게 반대하는 가족들과 친척들의 완강한 저항을 당해낼 도리가 없어서 미국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미 이때는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다 날리고 우리 팔남매와 어머님은 헐벗고 굶주림에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 미국 유학을 가기 위해 영어공부를 열심히 해서 영어 실력은 상당한 수준에 있었던 것이 미국행의 촉진제가 되었고, 우리 둘의 사랑과 결합은 한국사회에서는 절대 불가능했었기 때문에 미국으로 가는 것 외의 다른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미국에 가서 보금자리를 이루고 성공해서 어머님과 일곱 동생들의 앞날도 책임지고, 아내의 두 아이들도 잘 자라게 해 줄 것이라고 굳은 결심을 했었다.

3. 미국 이민생활 초기, 어려움, 갈등, 적응하기 위해 어떤 노력들이 필요했는지?
가지고온 2백 달러도 아내 친구에게서 빌린 돈이었고 우선 먹고 살기위해 무슨 일이든 일자리만 있으면 하려고 덤벼들지 않을 수 없었다. 유학생이었기 때문에 낮에만 있는 정규학교에 다녀야 했고 늦은 오후부터 밤에 일을 해서 서울의 가족 생활비를 보내고 학비를 내고 우리 부부는 최저의 밑바닥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렵게 얻은 주유소에서 기름 넣어주는 일을 해서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갔고 아내는 바느질공장에서 실밥 따는 일과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잠은 네 시간, 아침에 학교에 가서 여섯 시간 반을 공부하고 주유소에 달려와 오후 세 시부터 밤 한 시까지 열 시간 일을 했다. 정비학교를 수료하고 정비사의 길을 가기 시작했고 불법 체류자가 되어 항상 불안한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영주권 받을 수 있는 길을 찾았다. 가진 것이 없는 맨 주먹뿐인 우리에겐 영주권을 받을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무슨 일이든 하려고 했었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서울의 가족들 굶기지 않기 위해 뼈가 아프도록 일을 했고 아내는 그 아름답고 세련된 미모에 땀을 씻으며 바느질 공장에서 주유소에서 일을 하며 고달픈 삶을 살아야 했다. 처음 2년 정도는 살아가야 할 방향이 어딘지, 앞으로 어떻게 우리의 인생을 이끌어 갈지 그런 것은 생각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저 살아야 하겠다는 굳은 각오뿐이었다. 이민국에 불려가 추방 위기에 당했을 때도 우리의 성실히 살아가는 모습 때문에 추방을 당하지 않았고 버지니아의 어느 부호 집에서 하인생활을 해서 결국 영주권을 갖게 되었다. 미국에서 살아남으려면 남들보다 우수한 기술이 있어야 하고, 영어를 잘 할 줄 알아야 하고 힘든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되었고 우리는 오직 주유소나 정비공장 갖는 것에 큰 희망을 걸고 열심히 그 길을 뛰었다.

4. 가장 어려웠던 순간
로스앤젤레스 이민국에 불려가 추방위기에 처했을 당시의 우리 생활이 너무 비참했었다. 우리에게는 정말 힘든 위험한 때였다. 또한 버지니아에서 돈을 벌기 위해 듀퐁사에서 하루 열여섯 시간씩 일할 때는 등골이 시큰하고 몸의 기력이 다 빠져 가슴에 통증이 올만큼 건강을 망치면서까지 일을 했다. 결국 그렇게 해서 버려져 폐허가 된 주유소를 수리해서 사업이란 걸 처음 시작하게 되기는 했지만 내 체력으로 견디기 힘든 노동이었다. 어렵게 장만한 주유소에 물난리가 나고 불이 나고 지친 몸으로 뒷수습을 했던 당시의 비참한 꼴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버지니아에서 잘 되고 있던 정비공장을 도로공사로 문을 닫고 처량하게 로스앤젤레스로 다시 돌아와 적은 밑천으로 장사가 안 되는 주유소를 인수해서 일으켜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자금이 없는데도 정비공장을 장만하려고 끈질기게 노력했던 시기는 정말 힘들었었다. 그 후의 LA폭동은 위험한 순간이긴 했으나 나의 정비공장에는 흑인 직원이 지켜주어 큰 어려움은 없었다. 1994년의 경제 불황 때 인건비를 줄이고 내 몸으로 대신 때우며 불황의 위기를 넘길 때도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었었다.

5.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 행복했던 시절
미국에 온 지 이십 년 만에 나의 가장 큰 꿈이었던 정비공장 신축공사가 끝나고 넓은 새 공장 개업식을 가졌을 때 나는 너무 기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었다. 어머님과 모든 동생들과 우리 자녀들과 지인들이 다 모인 그 자리가 그렇게도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그 후로 배우지 못하고 어렵게 살아 온 동생들이 각자 가정을 이끌어가고 마지막으로 여덟째 막내까지도 고등학교 교사가 되어 자기들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나는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아내와 같이 넉넉하진 않지만 행복한 삶을 살면서 첫딸 제인과 둘째 재넷을 가슴에 안았을 때가 내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그 후로 아이들이 잘 자라고 공부도 잘하고 사업도 잘 돼서 우리가정은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정말 행복한 가정이었다.

6. 암 발병을 알게 되었을 때의 심정
체력을 꾸준히 단련해서 건강한 몸으로 정비 회사를 잘 이끌어가고 있던 내가 폐암에 걸렸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예순두 살의 한참 일할 나이에 죽음이 닥쳐오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속으로 받아드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나의 인생이었구나, 했다. 줄기차게 열심히 달려가던 내 앞에 좌절과 절망만이 기다리고 있고 꿈과 희망과 사랑과 행복을 순간에 앗아가는 천만 길 아득한 벼랑 밑으로 떨어져가는 괴로움이 있을 뿐이었다. 내 인생이… 내 생명이 여기서 끝난다는 두려움이 가슴을 울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딸들을 더 이상 바라볼 수 없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나로부터 떠나버리는 순간이었다.

7. 암 발병을 알고 난 후의 소회 [아내, 딸… 그리운 고향]
미국에서 살아온 지난 삼십이 년 동안 변변한 휴가도 한번 못 가져보고 여행도 못 해보고 고향에 묻혀 계신 조상님들도 한번 찾아뵙지 못한 것이 너무도 후회되었다. 정녕 아버님 조부모님 증조부모님 산소에 엎드려 절 한번 올리지 못하고 가 버리는 것일까 하는 서러운 생각이 들었다. 한 평생 같이해온 아름다운 아내와 사랑스런 딸들을 두고 이 세상에서 완전히 떠나고 없어진다는 두려움에 짓눌려 있었다. 너무도 행복했던 인생을 안겨준 아내가 가슴이 터질 것 같이 사랑스럽게 느껴지고 지금 이 순간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잘 자라준 딸들이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원하는 길을 열심히 가고 있는 것이 보기에 흐뭇했고, 아름다운 얼굴에 아빠로 인해 눈물자국이 얼룩져 있는 것을 볼 때 견딜 수 없도록 쓰리고 아팠다.

8. 길고 힘겨운 투병생활을 이겨낼 수 있었던 근원적인 힘은?
재산 상속, 정비회사 정리, 은행 부채 청산, 세금 완납 같은 것을 철저히 해서 내가 죽은 뒤에 아내와 아이들이 살아가는 데 아무런 어려움 없도록 해두었다. 강한 치료를 받으면서도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죽을 준비를 단단히 했다.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마음이 굳혀진 이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옆을 떠나지 않고 간호하는 데 온 정성을 다하는 아내의 헌신적인 노력에 감동되어 가슴 한편에서는 죽지 말고 살아야 하겠구나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정말로 상상도 할 수 없을 만치 지극한 병간호를 받으며 지난 세월에 가졌던 행복보다 더욱 엄청난 행복에 취해 있었다.
아빠를 잃는다는 두려움에 질려있는 딸들의 창백한 얼굴과 아내의 수심에 가득 찬 슬픈 얼굴을 볼 때마다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되겠다는 강한 결심이 나도 모르게 솟아올랐다. 이것이 나를 힘든 투병생활을 뛰어넘는 힘이 되었고 영양음식과 철저한 운동, 공기 맑은 자연 속에서 땅과 하늘의 기를 온몸에 받으며 기운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최신 설비로 갖춰진 암 전문 병원과 훌륭한 전문의가 세심한 처방을 해서 액체핵물질을 간암에 투입하여 간암을 없애고 IMRT[Intensive Modulated Radiation Therapy;집중적으로 조절된 강력한 방사선 치료]로 폐암을 제거하는 첨단 의료기술에 의해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 소리가 나도 모르게 터져 나왔다.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는 그 힘든 투병 중에 구리반지 소설을 쓰며 잃어버린 말을 되찾기 위해 많은 한국어 소설과 책을 읽고 문학공부를 한 일이다. 나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린 다른 세계에서 젊은 시절의 나로 돌아가 그 때의 내가 되어 일어났던 일들을 종이에 옮겨 쓰는 영혼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아내와 죽고 못 살던 연애시절의 황홀함은 가슴속에 희열을 가득 담았고,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일곱 어린 동생들이 이 맏형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장면에서는 통곡을 했었다. 슬픈 추억이 스쳐갈 때마다 뜨거운 눈물이 책상 위에 고였던 일이 수없이 많았다. 그런 감동이 매일 마음속에서 일어나면서 나도 모르게 나는 글 쓰는 작가가 되어갔고 마음은 기쁘고 환희에 찬 일상생활에 생기가 넘쳐흘렀다. 글을 쓰는 지난 4년 동안 가슴속에서 새싹이 움트는 기운을 느낄 때가 수없이 많았었다.

9. 투병 중 가장 어려웠던 순간과 육체적 정신적 한계에 도전한 필자의 강한 의지… 그리고 현재의 건강상태?
병원에서 담당의사가 3개월을 못 넘긴다는 사형선고 같은 말 한마디, 갖은 고통을 무릅쓰며 참고 받아온 치료 결과가 더 나빠졌다는 절망적인 말, 화학 주사 치료는 어떤 약을 투입해도 말을 듣지 않고 암이 점점 자라서 앞으로 임상실험을 해보는 수밖에 없다는 의사의 말, 폐암이 너무 크게 자라 숨을 쉴 수가 없는 고통이 오고 몸의 힘이 다 없어져 다섯 발자국도 걸을 수 없고 마룻바닥에 픽 쓰러지는 거의 다 죽은 나, 차라리 죽는 것이 소원이었든 나를 파랗게 질린 지쳐버린 얼굴로 애타게 바라보고 있는 가엾은 아내, 이래도 내가 살 수 있을까 하며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결심까지 하는 중에도 이상하게도 나는 죽지 않는다는 강한 의지가 모든 두려움을 억압하고 있었다. 그 의지는 내가 의도적으로 노력해서 생긴 것이 아니었고 그런 험악한 위험 가운데서도 사랑스런 아내와 열심히 살아온 지난날의 한없는 행복감에 젖어 꿈을 꾸고 있는 기쁨에서 우러나온 힘이었다. 먼저도 말했듯이 최신 방사선 기술에 의해 죽을 위기를 모두 넘겼을 뿐 아니라 네 개의 암 가운데 세 개가 거의 다 없어졌고 마지막으로 치료받은 암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미국에서 현대 의학으로도 폐암말기 환자가 5년을 넘기는 확률은 2~3%에 지나지 않는데 내가 그중 한 사람이라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집에서 쉬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건강요법을 다 하고 있다. 그중에도 숲속에서 흘러오는 나무 향기를 마시며 땅에서 오르는 기를 받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밝은 빛을 온몸에 받으며 심신을 닦는 일에 몰두하는 일이다.

10. 애초 3개월 시한부 생명을 선고 받았는데 치료를 받으면서 기적적으로 생명이 연장되고 치유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구리반지>를 쓰면서 달라진 인생관? 첨단 의료시설로 치료를 받았지만 '구리반지'를 쓰면서 정신적으로 위로와 힘이 되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처음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자녀들에게 이 아빠의 고향과 어린 시절과 한국에서 어떻게 살았고 엄마를 어떻게 만났는지를 들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에 와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두 딸들이 꼭 알고 있어야 한다는 간절함 때문에 되지도 않는 글을 쓰며 줄거리를 적은 것이었다.
3개월밖에 못 산다던 내가 치료를 통해 암이 많이 줄어들게 되자 써 놓은 줄거리를 좀 더 자세하게 다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는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며 소설 형태의 글을 쓰기 시작하게 되었다. 평생 글이라고는 써 본 일이 없는 그리고 미국에서 33년 동안 소설 한권 읽어본 일도 없는 내가 늙은이가 되어 거기다가 암 투병을 하면서 글을 쓴다는 건 너무도 무모한 짓이었다. 날이 갈수록 글 쓰는 것이 제대로 되어가는 것 같기도 했고 머리로 쓰지 않고 가슴으로 글을 쓰게 되면서 새로운 영혼의 세계를 발견하게 되었다. 투병에서 오는 고통과 마음의 괴로움과 세상의 번거로운 것을 다 잊어버리고 글 속을 헤매는 수도승 같은 내가 되어가고 있었다. 자연속의 나무숲과 새소리와 꽃냄새를 맡으며 사색에 취하여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고 지난날의 내 모습을 떠올리기도 했고, 아내와의 지나간 사랑을 다시 맛보기도 하며 꿈속에서 방황하기도 했다. <구리반지>를 쓰면서 마음과 정신의 수양이 비참하게 짓밟혀진 고통 속의 나를 기쁜 생활 속으로 이끌어 준 것 같았다. 아무리 괴롭고 고통스런 몸을 가지고 있어도 무엇엔가 자신을 잊어버리고 몰두한다는 것은 암 같은 치명적인 위험까지도 이겨낼 수 있는 기운을 얻게 된다는 것도 느끼게 되었다.

11. 건강이 회복되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
2008년 이 해가 지나면 고향을 떠나 미국에서 살아온 지 38년이 된다. 그 긴 세월 동안 아버님, 할아버지 할머니,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님 산소를 찾아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있다. 고향에 가서 조상님들 앞에 엎드려 소리 내어 울고 싶고 산소를 보기 좋게 다듬어 드리고 싶다. 그리고 조상님들 산소 옆에 자리를 펴고 여러 날 함께 있고 싶다.

12. 앞으로 한국에서 미국 갈때 비자가 면제 되는데요…선생님이 처음 이민 갈 때의 상황과 현재의 상황은 참으로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생활하는 한국인, 유학중인 한국인 학생, 그리고 미국 이민을 준비하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1960년대와 70년대 초에 미국에 간다는 건 극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우선 한국정부에서 여권을 얻어내기가 조건이 너무 까다로워 일반 시민들은 엄두도 낼 수 없었고 미국 비자를 받는 절차도 무척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나 올 수 있는 미국 땅이고 미국에서 정착하려는 한국인들도 수십 만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미 불법 체류자가 된 한국인들이 삼십만을 넘는다는 이야기도 들려옵니다. 영주권을 받는 문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렵기는 마찬가지지만 요즘은 투자이민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을 많이 이용하고 있습니다. 어디서 살든 살아가는 데 무엇보다도 우선해야 할 것은 성실과 근면이겠습니다. 이 땅에는 영리하고 똑똑한 사람, 학식이 높고 두뇌가 잘 회전되는 사람, 묘수를 부리며 약삭빠르게 구는 재주꾼 등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잘난 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보라고는 한 사람도 볼 수 없고 모두 똑똑한 사람들뿐입니다.
자기의 잘난 것과 영리함과 높은 학식을 믿고 남들 위에 서 있으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자신의 내장까지도 다 끄집어 내버리고 맨 밑에서 열심히 일하며 땀 흘릴 각오가 없으면 미국 땅에서 살아남기가 어렵습니다. 미국은 우리가 활보할 수 있는 내 나라 내 땅이 아닙니다. 우선 영어를 못하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내 땅 한국에서 장사를 해도 손님들에게 자세히 설명을 하고 물건을 팔아야 하는데 이곳이라고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영어를 잘 해야 장사도 하고 무엇이든 해 볼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다음은 직업입니다. 직업이란 전문적이어야 하고 그중에서도 남보다 앞서야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남들이나 비슷하거나 뒤쳐진다면 그 분야에서 성공할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하겠지요. 남들이 따를 수 없는 탁월한 기술, 지식, 재주, 기능을 갖추어야 살아갈 수 있는 건 한국에서도 마찬가지겠지요.
제일 중요한 것은 성실과 근면이겠지요. 성실에다 투지, 근면, 영어를 잘하고 꾸준한 노력을 갖춘다면 그 전문업은 반드시 크게 성공하리라 믿습니다. 무섭게 일하고 잠을 푹 자 보는 게 소원이며 잔꾀를 부리지 아니하고 바보처럼 꾸준히 자기 맡은 일에 열정을 다 쏟는다면 미국에 와서도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13. 아내 그리고 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
고달픔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고 좌절과 절망이 닥쳐와도 다시 오던 길을 걸었던 우리의 삶을 지금까지 이끌어 준 것은 오직 사랑의 힘이었다. 서울 명동에서 제일가는 미인이었고 패션디자이너였던 아내가 열심히 살아보려고 여자로서 할 수 없는 너무도 힘든 육체노동까지 하며 나를 따라왔다.
아내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남은 인생을 즐기며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지금같이 살아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마음씨가 비단결 같이 아름답고 무엇 하나 부족함 없는, 남편을 위해서라면 생명까지도 버릴 그런 여자라는 걸 알았다. 이제 칠십이 다가오는 나이에도 이 못난 남편을 위한 일이라면 모든 것을 제치고 약한 몸을 던져서라도 해보려는 정성에 너무도 크게 감격하고 있다. 내 인생은 당신 때문에 화려하고 찬란한 빛으로 아름답게 그려져 있소 라고 고백하고 싶다.
아름다운 딸들에게도 지금같이 살아주면 된다고 더 바랄 것이 없다고 말하고 싶다. 건강하게 재미있게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그대로 잘해 나가면 되는 것이라고 말 해주고 싶다. 영리하고 아름답고 이지적이며 나무랄 데 없는 딸들, 성장 과정에서 나에게 엄청난 행복을 안겨준 딸들이 무척이나 자랑스럽다.

14. 앞으로의 계획?
5년이라는 긴 세월을 병상에 있으면서 갖가지 생각에 잠기던 중 우연히 떠오른 Idea 하나가 나를 사로잡았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영어교육이지만 색다른 현대식 교육 방법으로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영어학교’다. 지금 이미 딸 제인을 중심으로 교재 연구를 하고 있고 내가 완전한 몸이 되는 대로 직접 관여하려고 한다. 한국의 어린이들도 큰 혜택을 볼 것이라고 믿고 있다.

15. 구리반지를 읽게 될 한국 독자들에게 전하는 말?
제가 겸손히 말하고 싶은 것 중에 서로가 힘차게 뭉쳐진 사랑은 자기 능력을 넘어서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 앞에서는 두려울 것이 없고 못할 일이 없을 만큼 무서운 힘이 생겨납니다.
형제들을 자기 몸같이 위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는 마음이라면 그 사람은 반드시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일 것입니다. 자기 자신만 챙기는 사람보다 더 큰 축복을 받으며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언제나 베푸는 사람이 더 잘 살게 마련이거든요.
지금 하시고 계신 일이 어떤 것이든 앞에서도 말했듯이 남보다 뛰어난 전문성이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될 줄 압니다. 그리고 한 가지 일에만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보람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여러분은 한번 깊은 사색에 빠질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건강을 잃으면 인생은 끝입니다. 건강을 해치는 담배와 술과 무절제 생활을 멀리 하시기 바랍니다. 들려오는 유혹의 소리를 멀리하고 탄탄한 가정을 이루며 건강한 몸으로 힘찬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영원까지 함께할 단 하나의 사랑!

살면서 너무도 많은 비바람과 높은 시련의 선들을 넘어 여기까지 오는 동안 푸르던 젊은 날은 어느새 지나가고 노년에 접어들었지만 후회 없는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의 편견과 곱지 못한 시선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함께할 영원한 사랑을 선택한 우리야말로 보석보다 아름다운 삶을 살아온 게 아니냐고, 내 사랑 혜찬이의 손을 꼭 잡은 채 난 가슴속으로 뜨겁게 외쳤다.

"혜찬이! 너를 사랑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다. 세상에 나서 오직 한 사람,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했다.
언젠가 우리 이별의 날이 오더라도 당신이 있었기에 나는 가장 멋지고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거야. 사랑해,
혜찬! 영우너까지 함께 할 단 하나의 내 사랑…."
-본문에서

프롤로그 - 금 간 담벼락에 피는 꽃

1.석천리 돌패기에 묻어 둔 나의 유년
2.영등포 판잣집에서 키운 꿈
3.잊지 못할 일들, 잊히지 않는 사람들
4.장남이라는 삶의 무게
5.심장에 새긴 그 이름, 혜찬
6.누구에게도 말 못할 사랑을 가졌어라
7.그럼에도 우리는 사랑을 선택했다
8.구리반지
9.마침내 꿈꾸던 아메리카로
10.리치몬드 대저택
11.피와 땀으로 맺은 열매
12.다시 로스앤젤레스로
13.꿈에 그리던 어머니, 보고픈 형제들
14.너를 사랑하는 것이 나의 행복이었네

에필로그 - 꼭 한번 만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