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가야트리 스피박은 인도 캘커타 태생의 여성 이론가로, 그동안 『다른 세상에서』(1987), 『포스트식민 비평가』(1990), 『교육기계 안의 바깥에서』(1993), 마하스웨타 데비의 작품을 영역한 『상상의 지도들』(1995), 『스피박 독본』(1996),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1999), 『분과학문의 종말』(2003)에 이어 『다른 여러 아시아』(2008)를 출간하였다. 스피박의 이론은 해체론, 포스트식민주의,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문화론의 이론적 지형들과 복합적으로 연계되어 있어 난해하고 복잡하다. 게다가 자세한 설명 없이 툭툭 던지는 식의 불친절한 글쓰기로, 유보적이고 비정형적인 글쓰기로 논의의 맥락을 따라잡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오늘날 지구화 시대의 복잡다단한 현실을 이해하고 바꾸어내려면 손쉬운 설명과 안이한 낙관성을 요구하기보다 복잡함, 복합성, 다중성을 붙들고 씨름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이론의 난해함을 통과하는 자세로 스피박의 책을 읽고 밀도 있는 사유를 펼쳐보려는 자세가 요청된다고 하겠다.
프란츠 파농에게서 통찰과 영감을 받고 에드워드 사이드, 호미 바바와 함께 스피박이 형성해 온 포스트식민주의, 주변성 담론, 소수자 담론은 제국주의/식민주의의 강력한 지배와 착취에 대응하는 20세기 후반의 중요한 탈식민 기획으로 정의된다. 하지만 스피박은 주변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전 지구적 자본주의 현실에서 재조정되고 있는 서구 중심의 지배형식에 순응하는 ‘새로운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하며, 주변성의 담론을 떠받치는 포스트주의들과 전 지구적 자본의 재배치(국제적 노동 분업) 사이에 은폐되어 있는 공모관계를 지적하고, 또 제국주의적 폭력구조들로부터 비껴선 투명한 존재라는 지식인 이데올로기를 끈질기게 파헤쳐낸다. 지식인들의 탐색자라는 위치가 탐색 대상을 전유함으로써 자본의 이해관계와 공모하게 되는 결과를 자기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가운데 스피박은 자신도 ‘인도적인 것’을 서구 문단에 제공하는 ‘첩보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경계한다. 이러한 인식에 따른 스피박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정치적으로 독립한 제3세계가 경제적, 문화적으로 여전히 처해 있는 종속 상태를 제대로 인식하고 해석할 수 있도록 하는 이론구성과 지식생산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다른 여러 아시아』는 ‘위로부터’의 읽기와 가르치기의 윤리를 ‘아래로부터’의 서발턴 관점과 ‘대리보충’하는 관계 속에서 지속시키는 방법을 아시아의 복수화라는 과제로써 구체적으로 모색한다. 출생이라는 우연에 의해 아시아라는 이름을 주장하는 한 사람으로서 스피박은, 미국-러시아-유럽의 권력-이익에 따라 구성되고 배열되며 호명되는 아시아의 특정 부분을 아시아라고 생각하는 태도나 우리의 정체성을 단일하고도 고정되게 기술하는 것으로 또 경제중심의 특정 권역으로만 아시아를 바라보는 태도를 넘어설 것을 요청한다. 그래서 스피박은 그동안 관심을 갖고 있던 권역들 바깥에서 아시아를 찾아보자고, 광대한 중앙아시아에 대한 무지를 벗어나자고, 지구화 욕망에 따른 석유 접근권 때문에 최근에 부상한 포스트소비에트 권역을 지구적 게임에 저항하는 서발턴적 대항집단성의 부상이라는 맥락에서 보자고 주장한다. 지구화에 맞서는 지역이라는 최소 단위의 공간을 좀 더 넓게 또 융통성 있게 묶어내는 권역 사유에서는 특정한 단일 정체성에 귀속되지 않고 이동하는 입장들의 전체 집합으로서 아시아 상상이 가능하다. 이러한 사유의 궤적은 정체성의 정치에 기반한 반식민주의, 민족해방 투쟁, 민족정체성이라는 개념을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보는 데서 그려진다. 지구적 게임을 견제해야 할 남반구 국가들의 역할이 여전히 필요한 만큼 포스트국가적 세상이라는 말도 좋은 구호가 아니다. 그래서 스피박이 내세우는 것이 ‘비판적인 권역주의’ 세상이다.

이 책의 구성
『다른 여러 아시아』는 총 7장과 인터뷰 기록인 부록으로 되어 있다. 먼저 1장 “잘못을 바로잡기”와 2장 “책임”은 북반구와 남반구의 계급 분할 선을 가로지르는 인권운동과 엘리트 교육 및 이론이 지닌 문제를 윤리/정치, 정의/법, 인식소/제도, 교육(인문학)/인권운동, 무조건적 환대/조건부 환대, 책임/권리 사이의 ‘대리보충’ 관계로 풀어야 할 것을 주장한다. 1, 2장은 정치적 교육적 행동과 실천의 근간에 있는 정신, 원리, 인식소를 윤리와 책임에 대한 치밀한 사유를 통해 해명하고자 하는 중요한 글이다. 십 년이라는 시간 속에 펼쳐지는 1, 2장의 사상은 나머지 장들에 나오는 다양한 논의와 분석의 바탕을 이룬다.
아르메니아와 아프가니스탄을 각각 다루는 3장 “포스트식민주의는 여행할 것인가?”와 4장 “푸코와 나지불라”는 이 권역에 대한 지구적인 무지를 넘어 아시아 내부의 차이들을 존중하고 알아가기 위해 복수화된 아시아 상상을 펼치는 글이다. 3, 4장은 남아시아 모델의 기존 포스트식민 이론을 수정하고 확장하는 새로운 형태의 아시아 연구다. 5장 “초대형 도시”와 6장 “이동하는 데비”는 ‘인도적인 것’과 관련된다. 5장은 2장에서 제기된 ‘책임의 사유 또한 오염의 사유’라는 인식을 방갈로르라는 인도 실리콘 산업 도시의 맥락에 개입시키고 있으며, 6장은 미국 맨해튼 미술관에 전시된 데비 여신에 관한 안내책자를 써 달라는 요청을 받은 스피박이 하이픈 그어진 미국인다운 글쓰기의 압력을 거스르는 가운데 힌두교, 힌두민족주의, 신앙, 상상력, 탈초월화에 관한 사유를 펼치고 있다.
마지막 7장 “우리의 아시아들”은 1장을 추동시키는 벵골의 선주민이라는 ‘아래로부터’와 대조되게, 대학이라는 ‘위로부터’ 우리 대륙의 복수화를 사유하는 글이다. ‘다른 여러 아시아’를 ‘위로부터’ 사유하는 7장의 입장은 1장에 나오는 ‘아래로부터’의 시각과 관점으로 '대리보충'되어야 하는 관계 속에 있다. 2004년에 행해진 인터뷰 기록인 부록에서는 정체성을 갖지 않는 입장을 ‘아시아’라는 이름으로 찾으며, 우리를 구속하고 제한해 왔던 정체성중심주의를 벗어나 ‘이동하는 장치’로서의 주체를 사유하자고 한다.

『다른 여러 아시아』의 이론적 입각점들
스피박은 남아시아 위주인 포스트식민주의 이론을 수정하고 확장하는 일환으로 『다른 여러 아시아』에서 다른 여러 아시아를 새로 인식하고 연구하게 하는 데 필요한 입각점들을 1) 비판적 권역주의, 2) 인문학의 사소화에 맞서는 인문학 교육과 상상력, 3) 이분법 항목의 역전과 치환에서 대리보충의 관계로, 4) 서발턴 영역에 입문해 듣고 말하기에서 액티비즘(벵골 아동교육 실천)으로, 5) 연구의 다른 원리와 방법으로서 창조적 전문주의와 연구의 다른 목표로서 계몽된 일반주의를 제시한다.
먼저 비판적 권역주의란 아시아를 복수화하는 작업을 이끄는 원리이자 방법론이다. 비판적 권역주의는 민족주의, 포스트국가주의에 반대하며, 초민족주의 입장에 서되 현 지구화의 방향을 틀 수 있는 국가의 재발명과 권역의 대항성을 촉진하고자 한다. 여기서 권역이란 그동안 지역으로 번역되어 왔지만 지리적 공간의 최소단위인 지역과 구분되어야 하며, 범위나 개념에서 좀 더 다양하고 유연한 공간의 구획화를 함축한다. 비판적 권역주의에 따른 복수화된 아시아 연구는 남아시아, 동아시아 등 자체의 권역에만 치중하는 단일화 태도를 넘어서 아시아 내부의 차이들을 알아가고 존중하는 태도로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로 연구 영역을 넓히며 아시아를 재배치하는 것이다. 그런 연구의 구체적인 예가 아르메니아를 다루는 3장, 아프가니스탄을 다루는 4장, 중앙아시아 지역의 이슬람을 논의하는 7장이다.
인문학의 사소화에 맞서는 인문학 교육과 상상력이라는 입각점은 인문학의 역할 혹은 윤리적 정치적 과제를 주체들의 다양한 ‘욕망을 비강제적으로 재배치’하는 것으로 정의하는 데 기반을 둔다. 여기서 욕망들이란 의식과 이성의 억압을 받고 있는 주체의 이면에서, 또 물질과 성공과 경쟁에 고착된 주체의 내면에서 들끓는 욕망들을 가리킨다. 이 욕망들을 조정하는 것은 현 지구화 세상과는 다른 정의로운 국제적 세상을 만들어 가기 위해 필수적이다. 그런데 욕망들의 조정은 강제적으로 집단적으로 또 위로부터가 아니라 자율적으로 감성적으로 또 아래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상상력이 필요하다. 상상력은 그저 문학에 제한된 것이 아니라 온갖 부재하는 것들을 생각하는 능력이므로 사유와 거의 동일하다. 스피박에게 인문학을 통한 초민족적 읽기능력literacy의 함양이 중요한 것은 주체의 정신, 윤리, 인식소, 가치에 변화를 초래해, 욕망의 비강제적 재배치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욕망의 재배치’만으로는 부족하다. 주체의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제도의 변화로써 ‘대리보충’되어야 지속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제도의 변화는 욕망과 인식소의 변화로써 ‘대리보충’되어야 한다.
『다른 여러 아시아』에서 대리보충 관계에 대한 인식은 내내 관철되고 있다. 스피박은 푸코보다는 데리다를 따라 법/정의, 권리/책임(윤리), 서구(문명)/비서구(야만), 글쓰기/말하기, 인식소/제도, 정치경제/가사경제, 남성/여성, 우리/그들, 주체/타자 사이의 위계적이고 억압적인 이분법적 관계를 새로운 관계로 만들기 위해 그 위계를 역전시키기도 하고 수평적인 관계에서 양자의 자리바꿈을 시도하는 가운데 억압성과 위계성이 아닌 형태로 양자 간의 관계를 새로 형성할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이 책에서 ‘대리보충’이라는 관계 설정 방식이 적극 명명되고 주장되는 것은, 우리의 인식 체계를 틀 지워 온 이분법 항목들에 함축된 사물들이나 의미들을 충족한 현존으로 여겨온 형이상학이나 중심화 경향을 경계하고 거부하는 작용을 지속적으로 이끌어가는 것을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동안 스피박은 서발턴 영역에 입문해 세심하게 귀 기울여 듣고 제대로 말하는 것을 지식인의 중요한 과제라고 주장해 왔다. 이 책에서는 그 과제를 더 밀고 나아가 지식과 이론을 액티비즘(벵골 아동교육 실천)과 연계시키는 맥락에 놓는다. 미래의 아시아 유권자들 중 가장 커다란 부문이 아시아의 서발턴 아동들이다. 이들은 글로벌 엘리트나 식민화된 중간계급과는 다른 인식소적 공간을 여전히 점유하고 있을 것이다. 스피박은 자본주의를 탈안정화하고 자본을 사회적인 것으로 전화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인문학 교육으로 이 유권자들의 욕망을 재배치하고, 억압과 착취 속에 찢겨진 그들의 문화적 직물에 민주주의의 행동 습관들과 절차들을 꿰매어 넣어 민주주의를 영구히 집요하게 훈련시켜야 한다고 본다. 스피박이 제안하고 실천한 이와 같은 ‘교육운동’은 교육 부문에 그치는 게 아니라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운동과 맞닿아 있다.
이 책의 여러 글들은 ‘위로부터’ 하는 복수화된 아시아 연구의 다른 원리와 방법을 준비하는 훈련을 제공한다. 현 엘리트 교육 및 연구 기관들에는, 자기 영역의 전문성만을 강조하며 다른 분과학문과 소통하지 않는 고립적 태도가 만연되어 있다. 스피박은 이들의 배타적이고 제한된 전문주의specialism를 비판하며 창조적 전문주의를 따르는 연구와 훈련을 강조한다. 스피박에게 창조적 전문주의는 ‘사회과학적 엄밀함과 결합된, 언어에 기초를 둔 꼼꼼한 독법’, ‘정치적이면서도 문학적인 결을 섬세하게 읽어내는 독법’을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와 훈련은 전문적인 학문연구의 제한된 기율에 갇히지 않고 통상 일반적인 지식에 의존하며, 폐쇄적인 전문주의에 맞서서 연관을 만들어 내며 특정한 학문연구들을 수합해 낸다. 그때 우리는 폐쇄적인 분과학문주의 혹은 전문주의를 벗어나 계몽된 일반주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스피박은 대항지구화에 앞장서는 새로운 지식인 세대가 낳을 최선의 결실이 계몽된 일반주의이기를 희망한다. 하나의 목표로서 이 일반주의는 ‘초민족적 읽기능력’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확장되는 의미의 지평
스피박은 포스트식민주의 이론을 비롯한 각종 포스트주의의 주요세력인 구미 디아스포라 지식인들이 내놓는 개념과 이론들이 의도치 않게 야기하는,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제와의 공모성을 끈질기게 지적하고 비판해 왔다. 이에 따라 스피박은 미국 엘리트 대학의 위로부터의 교육에서 논의되는 이론들의 파급 효과를 경계하면서도 그 이론들의 비판적인 정수를 가르치며 초민족적 읽기능력을 제고하는 동시에, 벵골 선주민 서발턴 아동 교육 현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아래로부터의 교육 실천에 오랫동안 임해 왔다. 이러한 스피박의 활동 반경은 지구화 시대에 토착 지식과 문화를 전유하는 “진부한 혼종성을 작동하게 하지 않을 하나의 대항적 예”로서 자신을 구축하고자 한 자신의 의도를 입증한다. 스피박은 벵골의 선주민 아동들에게 암기와 셈하기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욕망을 비강제적으로 재배치’하기 위한 인문학적 읽기를 통해 상상력을 훈련하게 한다. 1장에서 스피박은 그러한 인문학/교육의 변호는 붉은 실을 자아낸다고, 이 붉은 실이 1장을 관통한다고 말한다.
1장에서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붉은 실은 이 책 전체에 짜여 들어가 있다. 스피박의 ‘붉은 실’ 비유는 자본 형성의 복잡한 망을 날실과 씨실로 짜여 들어가는 텍스트처럼 보는 데서, 또 오늘날과 같이 인문학이 사소화되는 시대에 텍스트를 촘촘하게 읽어내는 능력의 중요성을 함축하는 데서, 텍스트 직조나 풀기에 개입되는 강렬한 열정과 사랑을 말하려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정작 이 책에는 자본을 둘러싼 마르크스주의의 적색만이 아니라 생태주의의 녹색, 페미니즘의 보라색이 어우러져 있다.
생태주의 인식은 특히 5장에서 ‘비유럽 중심적 새로운 사회운동’ 중에 생물해적질에 맞서는 생태 농업 운동이 농촌적이면서 지역적인 것에 머무르는 것 같지만 “지구적인 것과 지역적인 것 사이에 개입하는 말하기”를 생산하고, “억압적이고/이거나 절단된 국가와, 자칭 국제 시민사회의 종종 억압적인 의제 사이에 개입하는 말하기”를 작동시킨다고 맥락화하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의 마지막 공산주의자 대통령인 나지불라의 처형 장면에 대한 명상으로 시작된 4장도 하나의 목적으로서 주장되는 (형식적) 권리보다 에코생물소에 대한 책임 속에, 인간의 유적 생명을 담지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자연’에 대한 책임(생태적 생존) 속에 끼어들 권리를 가치 있게 여기는 생태적 인식과 감성으로 끝난다.
스피박은 또한 서문에서 이 책 전체에 흐르는 페미니즘의 충동을 언급한다. ‘흐른다’는 표현은 책 전체의 저변에 페미니즘의 충동이 깔려 있다는 것을 말하며, 7장 모두에 페미니즘 인식이 관철된다기보다 꼭 필요한 적당한 곳에서 페미니즘이 논의된다는 것을 뜻한다. 1장, 2장, 5장에서는 각 장의 초점상, 또 분량상 여성 및 젠더 문제가 거의 논의되지 않지만 3장의 후반부에서 새로운 제국주의와 공모하는 지배적인 국제적 페미니즘의 양상이, 4장에서는 현 지구화 시대에 확립된 세계적 통치체계의 선두보초는 종종 정보와 커뮤니케이션 기술이며, 알리바이는 종종 여성임이 지적된다. 이 지적과 관련해 1975년경부터 시작된 전자 자본주의 시대에 미국과 소련 사이에 끼여 있던 나지불라가 품었던 근대 민족국가 수립에 대한 욕망은 서발턴 및 여성과는 분리된 것이라는 한계가 논의된다.
또한 6장에서 스피박은 인도의 위대한 여신 데비를 고급 힌두교의 일원론적 신앙의 측면에서가 아니라 세속주의, 적극적인 다신론 상상력의 측면에서 다룸으로써 남성 지배적 초점을 갖는 드높은 신전의 위대한 여신에 부여된 ‘신성한 것’에 간섭하여 ‘여성적인 것’을 부상시킨다. 그리하여 독자더러 초월적인 신앙의 윤곽을 벗어나 일상의 친근한 어머니들로, 농촌의 과부들에게로 시선을 옮길 수 있게 하며 일상 삶의 상상력을, 서발턴의 읽기능력과 행위자성을 간파할 수 있게 한다. ‘위로부터’의 입장인 7장에 개입된 페미니즘의 충동이라면 미국 대학의 교수법에서 젠더, 문화적 차이, 섹슈얼리티 문제를 포함시킬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는 데서 드러난다. 이렇게 책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페미니즘의 충동을 보건대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라 전 지구적 자본주의 가부장 체제라는 용어를 적극 쓰는 데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읽을 독자들은 그동안 진척된 동아시아 맥락에서의 한국 연구 혹은 한-중-일 연구가 남반구 아시아 국가들 중 정치적인 또 경제적인 힘 위주로 얼마나 제한되게 진행되어 온 것인가를, 다른 여러 (소수) 아시아 국가들에 특이한 형태로 완강하게 존재하여 온 선주민, 부족민, 종족들의 다른 인식소와 세계관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 상태에 있는가를, 이슬람을 배제하는 아시아 상상이 얼마나 편협하고 왜곡된 것인가를 인식하게 될 것이다. 구미의 거대도시 엘리트 교육과 벵골 선주민 농촌 아동 교육을 병행하며 이론과 실천을 오가는 부담과 힘듦을 보듬어 안는 스피박 식의 ‘책임’을 따라, 적녹보라 패러다임과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대항적 권역-지역 네트워크를 진전시킬 우리의 ‘책임’을 각자의 위치에서 즐겁게 지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서문

1. 잘못을 바로잡기 - 2002: 선주민의 민주주의에 접근하기
2. 책임 - 1992: 평원에서 이론을 시험하기
3. 1994: 포스트식민주의는 여행할 것인가?
4. 1996: 푸코와 나지불라
5. 초대형 도시 - 1997: 도시에서 이론을 시험하기
6. 이동하는 데비 - 1997: 비-거주민과 추방자
7. 우리의 아시아들 - 2001: 어떠한 대륙주의자가 될 것인가?

부록. 정체성을 갖지 않는 입장 - 2004: 얀 하이론의 스피박 인터뷰
주석
옮긴이의 글: 비판적인 권역주의와 인문학 교육을 통한 아시아의 복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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