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크 트라클(Georg Trakl)은 20세기가 낳은 위대한 오스트리아 시인 중 한 명이다. 트라클은 표현주의 시인으로 분류되고 있으나, 동시대 시인들과 거의 교류하지 않았고 자신만의 폐쇄된 세계에 고립되어 있었다. 때문에 그의 시는 다른 표현주의 작가들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아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했다. 27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약물 과다복용으로 생을 마감한 트라클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평생 방황하며 우울함에 빠져 살았다. 그의 시는 수많은 상징과 은유들로 이루어져 있어 일반인들에게는 난해한 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트라클의 시에는 한편으로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 하고 방황하면서 조화롭고 평화로운 세계, 즉 근원적 고향을 갈구하는 아웃사이더의 모습과 신을 상실하고 구원을 갈구하는 자신의 모습이, 다른 한편으로는 세기 전환기의 몰락의 분위기와 산업화에 의해 파괴된 자연과 정체성을 상실한 인간의 모습 그리고 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이 보여 주는 참상이 트라클적인 언어로 잘 압축되어 표현되어 있다.
올해,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을 맞아 당시 병력을 파병했던 14개국의 유엔 주재 대사들이 시를 낭송하는 행사가 있었는데, 하랄트 브라운 독일 대사가 낭송한 시가 바로 게오르크 트라클의 <그로덱>이었다. 올해는 트라클이 사망한 지 1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트라클의 개인적 배경과 당시의 시대 상황

1887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27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다 간 그의 삶과 작품은 고독자와 실향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는 그의 성장사와 그를 둘러싼 사회 환경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그의 아버지 토비아스 트라클은 소시민 계급 출신으로 철재상을 경영하면서 부를 축적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가족들의 삶의 양식과 자식들의 교육에 많은 신경을 쓰게 되었는데, 그의 자식들이 다니는 학교도 아버지의 사회적 위상에 맞게 정해졌다. 그러나 트라클의 정신적 교양의 완성은 학교가 아니라 알자스 출신 여성 가정교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녀는 독일과 프랑스, 두 개의 문화권에 속해 있어서 트라클이 일찍부터 프랑스 문화와 접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녀의 교육을 통해 고양된 감수성과 세련된 감각은 그로 하여금 편협한 교양 속물 계층을 증오하게끔 만들었고, 반면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편파적이다 싶을 정도의 호의를 보이게 만들었다. 이런 성향으로 인하여 그는 학교 제도와 대립하게 되었고, 결국 성적 불량으로 김나지움 공부를 중단하게 되었다. 그는 처음으로 사회와의 단절감을 체험했고, 이로부터 그는 국외자라는 타고난 운명을 걸머지고 살아가게 된다.
트라클은 1908년 21살의 나이에 빈에서 제약학을 공부하기 위해 생전 처음으로 고향 잘츠부르크를 떠난다. 그러나 그는 이 도시 생활에 적응하지 못 한다. 그에게 도시는 지옥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 후 1914년에 전장에서 코카인 과다 복용으로 사망할 때까지 그는 몇몇 친구들과의 서신 왕래와 교류를 제외하고는 혼자만의 외로운 생활을 영위했다.
트라클의 개인사에 있어서 누이동생과의 비극적 사랑은 그의 시세계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근거를 제공해 준다. 트라클의 어머니는 골동품과 음악 속에서 살았던 인물로서 자녀들에게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사는 여인이었다. 모성애의 결핍으로 인하여 그에게는 정서적인 결함이 나타났고, 누이동생과의 비극적 사랑은 이런 배경 하에서 잉태된 것이었다. 그는 이로 인한 죄의식으로 약물에 손을 대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개인적 체험에만 안주하였다면 그는 오늘날 위대한 시인의 반열에 오르지 못 하였을 것이다. 누이동생과의 근친상간이라는 죄의식은 오스트리아의 몰락과 1차 세계대전의 파국을 내다보는 그의 예리한 역사인식을 통해 전체적인 파멸의 체험으로 발전한다.

19세기 중반 이래 급속히 추진된 산업화로 인해 서구사회에서는 갖가지 사회문제가 발생하였다. 즉, 일부 계층이 생산수단을 독점함에 따라 빈부의 격차가 발생하고 이에 따라 계급 간의 갈등이 사회에 심각한 위협을 주고 있었다. 또한 전통적인 농촌사회가 해체되고 도시가 급속히 팽창하였다. 아울러 획일화된 기계문명 속에서 인간의 비인간화와 소외현상이 두드러지고 이와 함께 가치관의 혼란이 일어난 시기였다. 트라클이 살던 빈을 중심으로 하여 오스트리아의 상황을 살펴보면, 산업사회의 발달과 더불어 시민계층은 경제적으로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으나 정치권력은 여전히 황제와 귀족의 손아귀에 머무르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발전의 돌파구를 마련할 수 없었던 시민계층은 그 관심을 예술 분야로 돌리게 되었다. 그들은 장식적인 것에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삶을 가능한 한 많은 즐거움을 누려야 하는 유회의 공간으로 보았다. 반면 농촌사회의 해체 과정에서 희망을 좇아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은 불만족스럽고 열악한 생활환경과 직면해야 했다. 이들의 비참한 생활은 계속되는 경제적 궁핍으로 인해 더욱 가중되었다. 트라클은 외적인 것에 치중하여 휘황찬란하게 번쩍이는 건물들과 춤추며 흥을 내고 있는 시민들, 그리고 그 그림자 속에서 고통에 떨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극단적인 두 모습을 통해 다가올 몰락과 종말을 감지했다.

트라클의 작품 세계

1. 산업화 과정에서 자본과 물질의 집중화를 통하여 발전의 상징으로 대두된 도시 공간은 보들레르 이래로 유럽 현대시에서는 부정성의 공간으로 인식되는데, 트라클에게 있어서도 도시는 “부패의 장소이자 삶을 절멸시키는 장소”로서 나타난다. 기술과 상업 세계를 특징으로 하는 도시에서 사람들은 에로스와 금전의 노예가 되어 살아간다. “도시는 인간의 내면을 죽이고 인간의 영혼을 빼앗고 그럼으로써 재앙을 위한 전제를 만드는 것이다.” 도시를 언급하는 그의 시들에서는 예외 없이 저녁과 밤의 분위기가 지배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시간을 통하여 부정적인 현상, 몰락의 이미지를 포괄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도시가 주는 공포감에서 예견된 몰락은 전쟁을 통해 무서운 현실이 된다. 트라클이 전쟁터에서 죽기 전에 쓴 시편, 「동쪽에서」와 「그로덱」은 그런 전쟁의 무서운 상황을 잘 전해 주고 있다.

2. 현대사회는 기계문명에 의한 인간의 평균화와 집단화, 그로 인한 자기소외, 공동사회에 대한 개인의 대립 등과 같은 포괄적인 존재 상실의 상황에 처해 있다. 물질문명의 중압감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기반을 상실하고 방황하게 된다. 트라클의 시에는 이런 상황을 잘 드러내 주는 ‘방랑자,’ ‘고향,’ 그리고 ‘고독’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그의 시에 나오는 ‘고향을 상실한 고독한 방랑자’란 모티프는 그가 처한 개인적 상황을 나타낸 것일 수도 있지만 그가 살던 시대의 지배적인 인물 형상의 표현이자 해석인 것이다. 그의 시에 나오는 ‘태어나지 않은 자’ 또한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태어나지 않은 자’는 삶이 진실에 충만해 있으며 신과 자연 그리고 인간이 조화를 이루던 곳, 즉 인간이 근원적으로 희구하는 ‘고향’에 사는 자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런 고향은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트라클의 시에 등장하는 ‘카스파 하우저, 엘리스, 제바스치안’과 같은 ‘태어나지 않은 자’의 현실세계에서의 운명은 암담한 것이다. 그의 시의 한 구절처럼 “영혼은 지상에서는 낯선 것”이고, 이방인이기에 이런 인간이 해방되고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죽음을 통해서일 뿐이다. 트라클의 시는 이처럼 고향을 상실한 인간의 운명을 그림으로써 현실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시인 자신의 모습과 산업사회의 거대한 위력 앞에 존재 기반마저 위협받고 있는 당대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3. 트라클의 시는 파괴된 자연의 모습을 통해서도 그 시대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데, 그의 시에서 자연은 인간에게 적대적이고 인간을 불안에 떨게 하는 위협적인 요소로 등장한다. 이는 산업사회라는 현실이 보여 주는 증대되는 혼돈 상태가 내면세계와 외부 세계가 조화를 이루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는 몰락을 상징하는 도시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여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농촌조차 ‘파멸의 풍경’으로 그려지고 있다. 산업사회의 폐해가 농촌에까지 파급된 것이다 그리하여 자연은 더 이상 예전처럼 조화와 안정의 대상으로서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자연의 모습은 인간의 위기의식과 연결되어 유럽의 몰락이라는 시대적 운명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4. 릴케는 트라클의 시를 “거울의 공간처럼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공간”이라 했다. 이처럼 트라클의 시는 독일인들에게조차 난해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이런 난해함을 불러일으키는 요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색채 상징’이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색채어는 시각적인 인상을 묘사함으로써 현실을 묘사하는 정상적인 사용법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의 색채어는 오히려 외부 현실에 대한 시인의 주관적인 기분을 표현하는 상징의 기능이 강하다. 즉, 그의 색채어는 다의성을 합의하고 있는데, 특히 색채어가 추상명사와 결합될 때는 시인의 감정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기능을 하게 된다. 이러한 색채를 통한 상징은 색채를 대상으로부터 분리시켜 그 색채에다 특수한 독립성, 다시 말하면 시인의 체험 세계에서 생성된 독특한 고유 가치를 부여한다. 그렇기에 그의 시들 속에서 무수한 상들과 결합하는 색채어는 시대적인 배경이나 개인적 체험을 배제한 채 그 자체로서 의미를 파악하기가 힘들다.

5. 트라클은 양식의 변화를 통해서도 현실의 혼돈스런 모습을 표현한다. 그가 택한 양식은 ‘나열 문체(Reihungsstil)’인데, 특정한 연관이 없는 단편적인 상들을 서로 느슨하게 병렬적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양식에 대해 “네 개의 시행 속에서 서로 다른 네 개의 이미지들을 단 하나의 인상으로 짜 맞추는 나의 비유적 방식은… 각고의 노력으로 얻어진 방식”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렇게 시의 양식이 바뀌는 것은 이전과는 다른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동시대의 다른 표현주의자들은 도시의 다양하고 이질적인 분열상들을 시 형식 속에 나열함으로써 도시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려 했으며, 이를 혼란스러운 사회와 그들에게 적대적인 현실을 비판하는 양식 수단으로 삼았다. 그러나 트라클은 이 시 형식을 도시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농촌을 포함한 모든 자연의 모습에도 적용함으로써 시대 현실을 비판하려 했다. 트라클은 이 ‘나열 문체’를 통해 조화로운 모습을 상실하고 분열된 시대의 모습과 황폐화된 인간 정신의 단면을 보여 주려 했던 것이다.

6. 트라클이 비록 일상적 삶과는 거리를 두긴 했지만 그는 시대의 숨겨져 있는 진실을 시를 통해 전달하고자, 그의 말대로 “진리인 것을 진리에 주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는 겉보기에 안정되어 보이는 그 당시의 사회에서 몰락의 징후를 감지하였고 그것을 시를 통해 형상화해 내었다. 그의 시에는 그가 살던 시대의 편린들이, 즉 산업화에 의해 파괴된 자연과 정체성을 상실한 인간의 모습들이 트라클적인 언어들로 압축되어 표현되어 있다.
그의 시가 어두워 보이는 것은 그가 살던 시대가 전통적 의미의 아름다움이라든가 진실 같은 것으로 말해질 수 없는 시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트라클이 자신의 시를 통해 산업화 시대 속에서의 삶의 어려움과 부정적인 측면을 조명하고 드러내려는 의도의 배후에는 인간의 궁극적인 욕망인, 행복한 삶이 성취되는 완전한 질서에 대한 소망이 전제되어 있다. 인간과 세계가 분리되지 않고 조화로웠던 ‘근원으로서의 고향’에 대한 소망을 그의 시는 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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