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모든 문화는 향토적인 것에서 승화된 것’
팔순의 향토학자 이기화가 말하는
보릿고을, 고창의 지명과 명칭 유래
향토, 그 가치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이기화의 향토대서사시, 고창』은 고창의 전래 지명의 유래를 장편 이야기 형식의 서사시로 전하는 책입니다. 고창의 풍수지리적 맥부터 서해안 유일한 직선해안과 맞닿아 있는 구시포의 유래, 동학농민혁명 거사의 첫 봉기지 고창지역에서 최초의 동학도소가 열린 괴치마을 이야기, 방축리(方築里), 나성리(羅星里), 주곡리(蛛谷里) 등 각 마을의 유래까지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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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문화는 향토적인 것에서 승화된 것’
팔순의 향토학자 이기화가 말하는
보릿고을, 고창의 지명과 명칭 유래
향토, 그 가치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이기화의 향토대서사시, 고창』은 고창의 전래 지명의 유래를 장편 이야기 형식의 서사시로 전하는 책입니다. 고창의 풍수지리적 맥부터 서해안 유일한 직선해안과 맞닿아 있는 구시포의 유래, 동학농민혁명 거사의 첫 봉기지 고창지역에서 최초의 동학도소가 열린 괴치마을 이야기, 방축리(方築里), 나성리(羅星里), 주곡리(蛛谷里) 등 각 마을의 유래까지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고창 향토시인이자 이 책의 지은이 이기화는 ‘땅은 우리들의 생활터전이자 미래지향적인 문화 공간이다. 여기에는 우리들의 선영이 있고 역사, 지리, 언어, 민족 등을 통해 조상들이 이룩한 문화가 숨 쉬고 있다. 가장 향토적인 것이 가장 민족적인 것이며 가장 토속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으로서 우리가 거둔 모둔 문화는 향토적인 것에서 승화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이들이 오늘날 사회에 물들어 우리 조상, 역사, 지리, 민족의 가치를 뒤로 한 채 살아가는 지금, 100여 개의 서사시는 고창뿐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적합합니다.
시인은 방장산의 유래에 대한 시 마지막에 ‘왜놈들의 쇠말뚝 뽑기도 없어서는 안 되겠지만 모화(慕華)사상 근절은 우리의 주체성 회복에 절대보약임을 명심해 두자’라 말합니다. 또한 오뱅이(五方洞)골의 유래에서는 역사적으로 치욕스럽고 부끄럽기 짝이 없는 지명임을 명심해두자 등의 표현을 볼 수 있습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를 통해 당신의 고향 고창의 역사를 올바르게 전하겠다는 시인의 마음이 전해지는 책입니다.
[펴내는 글]
땅은 생활터전이자 미래지향적 문화공간
1948년의 여름 문학소년기의 중학생이 된 후, 처음 맞는 여름방학날이었다. 김영랑 시인과 동문수학한 이숙(姨叔)님을 졸라 방학 때면 열흘 기한으로 습작시(習作詩) 10편씩을 사사(師事)받기로 한 첫 날이기에 새벽부터 일어나 설쳐댔다. 그때만 해도 전남 강진을 가려면 기차편으로 영산포역에서 내려 트럭을 타는 수밖에 없었다. 역 광장에 대기하고 있던 이숙 댁 화물트럭으로 강진읍에 도착한 것은 밤 12시가 다 되었으니 무려 7시간을 짐짬 신세가 된 셈이다. 그냥 곯아 떨어진 채 이튿날 아침 밥상머리에서 눈을 떠보니 때마침 남포리(南浦里) 별장에 들렀던 영랑 시인께서 이숙댁에 왔다가 “너 이놈! 이제 보니 늘락지구나”한다. 반사적으로 어리둥절한 필자에게 “느림보 낙지도 몰라?”하신다. “너, 역사를 좋아한다지?”하시며 “그럼, 주관적인 묘사보다 객관적인 사건 서술의 해설, 설명, 논증 등의 기능 수행위주로 연마하는 서사시 기본교육을 익히는 편이 네 개성 발휘나 사회진출에도 도움이 되겠다”고 하셨다. 습작시 「눈 오신 아침」을 보시고는 눈 오는 모습을 제법 객관성 있게 잘 표현했다고 말씀하시며, “장독대에도 수북수북 쌓인 눈이 한결 높이 보인다”는 표현을 칭찬해주셨다(이 시는 뒷날 「새벗」지에 게재되었다).
이듬해 겨울방학 때는 3학년을 눈앞에 둔 데다 해가 바뀌면 시인께선 서울로 이거한다는 소문도 있어 필명(筆名)을 이화(李華)로 쓰면 어떨까 하고 사부님께 내밀었다. 훑어보시고는 “받아보는 분이 여학생으로 오해하겠다”며 팽개치기에 재빠르게 주어들고는 “그러면 저에게 기념으로 아호 하나 미리 주시면 안 되어요?”했다. “건방진 놈!”하시면서 이맛전에 꿀밤을 튕기시더니 이숙의 훈수까지 듣고나서야 “아따 이놈! 기생 오래비처럼 이쁘장허니 비단 錦자나 얹혀가거라”하시면서 습작지에다 ‘금랑(錦郞)’이라는 호를 써주시더니, 성년이 되면 활용하라면서 훈고 제(訓告\u003d題)까지 당부했다. 그 하나는 결코 시를 남발하지 말라-몇 집을 내든 시집을 간행할 때는 자기 나이편수를 넘기지 말라. 다른 하나는 누가 뭐라 해도 고창땅은 역사의 고장이니 너는 고향을 노래하는 향토시인이 되라는 준엄한 계시(啓示)였다.
오늘 사부(師父)의 계시를 준행하고자 망구(望九)가 지났으니, 백수종생(白壽終生)하는 의미로 임진왜란 이전의 전통지명[古地名) 100곳을 골라 향토대서사시 『고창』으로 늘락지 행보가 된 것이다.
땅은 우리들의 생활터전이자 미래지향적인 문화 공간이다. 여기에는 우리들의 선영이 있고 역사, 지리, 언어, 민족 등을 통해 조상들이 이룩한 문화가 숨쉬고 있다. 가장 향토적인 것이 가장 민족적인 것이며 가장 토속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으로서 우리가 거둔 모든 문화는 향토적인 것에서부터 승화되어 그 땅에는 우리 고창의 땅 이름은 통일신라의 경덕왕 16년에 옛부터 전해오던 고유한 땅이름을 당나라식 2자 한자로 통일표기함으로써 개악이 되고 말았다. 토박이 땅이름이 소리나 뜻으로 한자식 표기를 하게 되어 고유성과 순수성을 잃게 되고, 행정지명까지도 세 소리 마디 이상의 땅이름이 당나라를 본뜬 2자식 한자명으로 표기되고 말았다.
본래 우리 고창도 삼한시대에는 마한 땅의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에 속한 모이부곡(牟伊部曲)에서 비롯되어 백제시대에는 모양부리(毛良夫里)현은 고창현, 송미지(松彌知)현은 무송(茂松)현, 상노(上老)현은 장사(長沙)현, 상칠(上漆)현은 상질(尙質)현으로 바뀌었고 모양부리현은 모양(牟陽)으로도 불리었다. 또한 모양의 어원은 산남수복(山南水北)의 양지바른 보리밭, 보릿들, 보릿고을을 음미해 주었는데, 고창(高敞)현으로 뜻풀이가 되어 높을 高, 넓을 敞으로 보릿고을을 상징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2016년 5월
이기화

높고 드넓은 보릿골,
고창 사람들의 삶 그리고 풍경

                                
고창의 ‘高’자는 높을 고, 창 자는 높을‘敞’입니다. 옛 이름 모양현(牟陽縣)엔‘보리 모(牟)’자가 들어 있고, 고창고등학교 교가에도 한겨울의 추위를 잘 이겨낸 보리를 통해 고창정신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방장산은 그림으로 치면 고창의 배경이 됩니다. 한없이 높고 드넓은 방장산을 굽어보는 바, 고창 동쪽으로 꼬막등 같은 집들과 명매기샘의 물줄기가 주진천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go)’창으로 불러도 좋을 이름입니다.
주진천은 고수면 은사리 칠성마을 수량동의 명매기골에서 발원하고, 증산제를 통과한 뒤, 고창군 심원면 용기리 곰소만으로 흘러들어가는 하천입니다. 고창천과 합류한 이후 구간은 인천강(仁川江) 또는 태천(苔川)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명매기샘골(명막골)은 고창을 남북으로 관류하는 인천강의 시원지입니다. 천년고찰 문수사의 원시림으로 꽉 메운 취령산 북쪽 건너 등성이 장무재(長文峠)의 동쪽 잔등자락 남녘 골에 자리잡은 이 샘은 아무리 눈이 많이 내린 혹독한 겨울에도 결코 얼지 않아 고창 사람들과 꼭 맞닿아 있습니다.
저 멀리로 불어난 문수사의 계곡물은 가람을 에두르고 물이끼는 돌의 이마에서 한층 짙푸릅니다. 시나브로 계곡의 청량한 바람은 맑고 청아해서 꿈길을 걷는 듯 행복한 새벽길을 펼쳐놓습니다.
그대여! 행여 시린 마음 달래려거든 ‘하늘닮은’ 사람들의 희망, ‘하늘담은’ 고창에 눈길 한 번만 주시기를. 엄동의 서해 바다로 물줄기가 향할지라도 윤슬은 더 찬란하고 이내 삶은 뜨거워집니다.
보리 피리를 잘라 고창에서 하룻밤만 묵어도 천년의 세월입니다.
이기화 시인의 시집 『고창』은 고창의 전래 지명을 모두 주워 담은 까닭에 보릿골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 한숨과 눈물까지도 모두 담겨 있습니다.
시인은 지난 시대의 삶을 오늘에 투영시켜 우리의 삶을 밝고 따뜻하게 되살리고 있으며, 어제를 통해 오늘 우리의 삶을 성찰하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 비릿한 바닷 내음과 술취한 어부들의 한탄 소리, 동학군들의 창의를 통한 다짐의 소리, 소금기 어린 선비들의 글소리, 선술집의 소란스러운 소음까지도 한 폭의 정지된 그림으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또, 오준과 김질 등 고창이 낳은 효자들이 지금이라도 눈앞에 드러나 집힐 듯 고창이라는 특정 공간과 그곳 역사와 생활문화사가 시작품의 배경으로 설정됐지만, 한국인 모두의 고향, 그 의미의 전형성으로 승화시키려고 노력한 흔적들이 잘 묻어납니다. 고창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을 그렸지만, 이는 곧 우리 모두의 마음의 고향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람들처럼 ‘까칠하지 않고’ ‘까실까실 정이 메마르지 않았던’ 선조들이 생각나는 오늘입니다. 고흐의 ‘종달새가 있는 보리밭’이 현실로 다가오는 징표인가요. 종달새 몇 마리가 하늘 높이 떠 ‘파르르’, ‘뽀르르’ 목놓아 울부짖고 있습니다. 고개를 내밀고 내려다보면 오금이 저릴 만큼 아찔하기만 합니다. 아니, 푸르다 못해 눈이 다 시릴 지경입니다. 이곳 마을의 형체가 부채 모양과 같다고 하여 ‘부채울’이라고 한 바, 그 바람이 지금 웰빙으로 불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요?
비바람에 찢겨져 흩어지느니 차라리 목을 꺾는 고창 사람들의 비장함에 이내 맘도 푸르게 푸르게 언제나 떨리며 흘러가는 오늘입니다. 보리 물결이 출렁이면서 상념에 찌든 마음도 어느새 맑아집니다. 파란 꿈으로 수를 놓고 있는 희망도 종달새 지저귐과 더불어 여물어만 가는, 여기는 고창입니다.

- 이종근(새전북신문 문화교육부 부국장)
 

 

고창의 맥 (1)


태초에 열려진 마한 땅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

방등한 산이 높아
인내가 흐르고 옥답이 열리니
모량부리, 송미지, 상로, 상칠현.

완연한 사기(四氣)에
다순 기운 넘쳐나
칠산어장 얻었으니
비단결에 꽃을 보탰네.

여기가 도원향(桃園鄕)
대대로 그 맥 이어내니
가히 지상의 낙원.
역사의 수레는 눈길없이 굴러, 굴러
모로(山), 뫼, 산마루
몰랭이를 새김질하여
모이부곡, 모량부리로 열렸던
보릿고을 모양(牟陽)은
통일신라 경덕왕16년에
높을 고 넓을 창으로
고집스레 맥을 이었는데
애초에 무령(武靈)원이 거느렸다가
고려 초에 고부로 옮겨지더니
흥덕감무가 겸임하였다네.

송미지는 무송고을로
상로는 장사고을로 하여
무령의 영현으로 머물다가
조선 태종17년에
합궁하여 무장을 열었지.
상칠은 상질로 고쳐
고부군에 딸렸다가
볼모의 의미가 싫어
장덕으로 바꿨는데
충선왕을 피해 창덕으로 고쳤고
또다시 창왕에 밀려 흥덕으로 개명했네.

무장은 방리(坊里)가 16개 면으로
조선 헌종2년에 2등군으로 오르고
흥덕(興德)과 고창(高敞)은 각기 8개 면의 방리로
고종32년에야 3등군이 되었지.

목차
004 펴내는 글
017 고창의 맥 (1)
020 고창의 맥 (2)
023 양고살재길
025 한 많은 솔재(松峙) 길
027 고려의 무역항 죽도(竹島)
029 알뫼장터
032 상도솔(上兜率) 이야기
034 하도솔(下兜率) 이야기
036 고창물방앗등 이야기
036 월운방(月雲坊)의 달맞이
042 명주령(冥主嶺) 이야기
044갈울마을의 유래
042 한림동(翰林洞) 이야기
044 어사대(御史臺) 이야기
050 백운동(白雲洞)의 기적
052 성남리(城南里)의 역사
054 황산리(黃山里)마을의 유래
056 곡다우(曲多于) 이야기
058 강선교의 전설
060 풍천장어의 어원(語源)
062 고수자기(古水瓷器)의 맥
064 오뱅이골(五方洞)의 유래
066 우리 고장의 마즈막 정려(旌閭)
068 영군바위의 전설
070 창말(倉村)의 역사
072 개갑장터의 유래
074 오시랑(吳侍郞) 터의 유적
076 갈마리(渴馬里)의 유래
078 참나무쟁이(眞木亭)의 유래
080 마당바우 이야기
082 삼태(三台)의 유래
084 오태동(五台洞) 이야기
086 성두리(星斗里) 이야기
088 방등산(方等山) 이야기
090 모로(牟盧)의 어원
092 모량부리(毛良夫里)의 어원
094 모이부곡현(牟伊部曲縣) 이야기
096 명매기 샘골 이야기
098 약수향(藥水鄕) 이야기
100 궁산처(弓山處) 이야기
102 선인취와(仙人醉臥)의 유래
104방(榜)고개 이야기
106 등선(登仙)마을의 유래
108 구시포의 유래
110 심원면(心元面)의 유래
112 평장동(平章洞)의 유래
114 녹사(綠沙)마을의 유래
116 경방동(京坊洞)의 유래
118 첨금처(沾襟處)의 유래
120 낙산리(洛山里) 거북바위의 유래
122 장승백이의 유래
124 의향(義鄕) 고창
126 술항동(水浪洞)이 물랭기로
128 배풍산(培豊山)의 유래
130 송현리(松峴里)의 유래
132 방장산(方丈山)의 유래
134 명매기골의 전설
136 문수산(文殊山)의 유래
138 배맨바위(繫船岩) 이야기
140 학당골(學堂洞) 이야기
142 욕실촌(浴室村) 이야기
144 검당포(黔堂浦)의 유래
146 염정(?井) 이야기
148 보은염(報恩?)의 봉납행렬(捧納行列)
150 은사리(隱士里)의 유래
152 도성부곡(陶成部曲)의 유래
154 대량평부곡(大良坪部曲)의 유래
156 덕암소(德巖所)의 유래
158 백양동(白羊洞)의 유래
160 예지태(禮智台)의 유래
162 최초의 동학도소 괴치(槐峠)마을
164 계당(溪堂)마을의 유래
166 동산서원(東山書院)의 유래
168화산(花山)마을 이야기
170 열녀문(烈女門)고개의 유래
172 좌치나루(坐雉津) 이야기
174 창내(倉內·창안) 마을 이야기
176 냉기(螺形基) 마을 유래
178 수락(水洛)마을의 유래
180 장사성지(長沙城址) 이야기
182 의불여 고창(義不如 高敞) 이야기
184 왕촌(旺村)마을의 유래
186 고창읍(高敞邑) 이야기
188 사진포(沙津浦) 이야기
190 용산동(龍山洞)의 유래
192 칠성골(七星洞)의 유래
194 자룡리(紫龍里)의 유래
196 고려실(高麗谷) 이야기
198 강남리(江南里) 이야기
200 석정리(石汀里)의 유래
202 청계동(淸溪洞) 이야기
204 지로(芝老)마을 역사 이야기
206 신촌(莘村) 이야기
208 무실(芝老)마을 설기 유래
211 매산리(梅山里) 설기 유래
213 군유리(群儒里)의 유래
216 중산리(中山里) 이야기
219 방축리(方築里) 유래
221 나성리(羅星里) 이야기
224 세장(細庄·世庄)마을 이야기
227 주곡리(蛛谷里) 이야기
230 추천의 글_이종근 새전북신문 문화교육부 부국장

땅은 생활터전이자 미래지향적 문화공간

1948년의 여름 문학소년기의 중학생이 된 후, 처음 맞는 여름방학날이었다. 김영랑 시인과 동문수학한 이숙(姨叔)님을 졸라 방학 때면 열흘 기한으로 습작시(習作詩) 10편씩을 사사(師事)받기로 한 첫 날이기에 새벽부터 일어나 설쳐댔다. 그때만 해도 전남 강진을 가려면 기차편으로 영산포역에서 내려 트럭을 타는 수밖에 없었다. 역 광장에 대기하고 있던 이숙 댁 화물트럭으로 강진읍에 도착한 것은 밤 12시가 다 되었으니 무려 7시간을 짐짬 신세가 된 셈이다. 그냥 곯아 떨어진 채 이튿날 아침 밥상머리에서 눈을 떠보니 때마침 남포리(南浦里) 별장에 들렀던 영랑 시인께서 이숙댁에 왔다가 “너 이놈! 이제 보니 늘락지구나”한다. 반사적으로 어리둥절한 필자에게 “느림보 낙지도 몰라?”하신다. “너, 역사를 좋아한다지?”하시며 “그럼, 주관적인 묘사보다 객관적인 사건 서술의 해설, 설명, 논증 등의 기능 수행위주로 연마하는 서사시 기본교육을 익히는 편이 네 개성 발휘나 사회진출에도 도움이 되겠다”고 하셨다. 습작시 「눈 오신 아침」을 보시고는 눈 오는 모습을 제법 객관성 있게 잘 표현했다고 말씀하시며, “장독대에도 수북수북 쌓인 눈이 한결 높이 보인다”는 표현을 칭찬해주셨다(이 시는 뒷날 «새벗»지에 게재되었다).
이듬해 겨울방학 때는 3학년을 눈앞에 둔 데다 해가 바뀌면 시인께선 서울로 이거한다는 소문도 있어 필명(筆名)을 이화(李華)로 쓰면 어떨까 하고 사부님께 내밀었다. 훑어보시고는 “받아보는 분이 여학생으로 오해하겠다”며 팽개치기에 재빠르게 주어들고는 “그러면 저에게 기념으로 아호 하나 미리 주시면 안 되어요?”했다. “건방진 놈!”하시면서 이맛전에 꿀밤을 튕기시더니 이숙의 훈수까지 듣고나서야 “아따 이놈! 기생 오래비처럼 이쁘장허니 비단 錦자나 얹혀가거라”하시면서 습작지에다 ‘금랑(錦郞)’이라는 호를 써주시더니, 성년이 되면 활용하라면서 훈고 제(訓告=題)까지 당부했다. 그 하나는 결코 시를 남발하지 말라-몇 집을 내든 시집을 간행할 때는 자기 나이편수를 넘기지 말라. 다른 하나는 누가 뭐라 해도 고창땅은 역사의 고장이니 너는 고향을 노래하는 향토시인이 되라는 준엄한 계시(啓示)였다.
오늘 사부(師父)의 계시를 준행하고자 망구(望九)가 지났으니, 백수종생(白壽終生)하는 의미로 임진왜란 이전의 전통지명[古地名) 100곳을 골라 향토대서사시 『고창』으로 늘락지 행보가 된 것이다.  
땅은 우리들의 생활터전이자 미래지향적인 문화 공간이다. 여기에는 우리들의 선영이 있고 역사, 지리, 언어, 민족 등을 통해 조상들이 이룩한 문화가 숨쉬고 있다. 가장 향토적인 것이 가장 민족적인 것이며 가장 토속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으로서 우리가 거둔 모든 문화는 향토적인 것에서부터 승화되어 그 땅에는 우리 고창의 땅 이름은 통일신라의 경덕왕 16년에 옛부터 전해오던 고유한 땅이름을 당나라식 2자 한자로 통일표기함으로써 개악이 되고 말았다. 토박이 땅이름이 소리나 뜻으로 한자식 표기를 하게 되어 고유성과 순수성을 잃게 되고, 행정지명까지도 세 소리 마디 이상의 땅이름이 당나라를 본뜬 2자식 한자명으로 표기되고 말았다.
본래 우리 고창도 삼한시대에는 마한 땅의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에 속한 모이부곡(牟伊部曲)에서 비롯되어 백제시대에는 모양부리(毛良夫里)현은 고창현, 송미지(松彌知)현은 무송(茂松)현, 상노(上老)현은 장사(長沙)현, 상칠(上漆)현은 상질(尙質)현으로 바뀌었고 모양부리현은 모양(牟陽)으로도 불리었다. 또한 모양의 어원은 산남수복(山南水北)의 양지바른 보리밭, 보릿들, 보릿고을을 음미해 주었는데, 고창(高敞)현으로 뜻풀이가 되어 높을 高, 넓을 敞으로 보릿고을을 상징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2016년 5월
이기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