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정영문은 소설을 쓴다. 하지만 그는 소설을 쓰되 희곡적으로 쓴다. 소설은 늙고 병들고 정신마저 다소 이상해진 왕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이다. 정영문의 왕은 왕다운 왕이 아니며, 광대도 광대다운 광대가 아니고 시종도 시종다운 시종이 아니다. 왕에겐 아무런 위엄도 없고, 광대는 웃기지 않으며, 시종은 묻는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시녀는 왕에게 뜨개질거리를 던져준다. 정영문은 이 희곡적 소설을 통해, 내면 묘사를 할 수 없다는 희곡적 장르의 특성을 극단화시킨다. 대화가 아닌 독백에 무게를 실은 정영문의 매우 특이한 형식의 소설이다.
출판사 서평
2000년 웹진 과의 대담에서 작가 정영문은 앞으로 어떤 소설을 쓸 작정이냐는 물음에 \"지금까지 해왔던 방향을 보다 완전하고 철저하게 하고 싶다.\"고 말했었다. 아무것도 아닌 작품을 쓰는 것, 가치 없?음으로 가치를 지니게 되는 소설, 즉 절대적인 무의미를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발표한 신작 소설 《중얼거리다》는 작가 정영문이 도달하고자 하는 그 절대적인 무의미의 지점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정영문의 소설 《중얼거리다》는 제목 자체가 그의 소설형식을 그대로 말해준다. 말 그대로 주인공은 소설의...
2000년 웹진 과의 대담에서 작가 정영문은 앞으로 어떤 소설을 쓸 작정이냐는 물음에 \"지금까지 해왔던 방향을 보다 완전하고 철저하게 하고 싶다.\"고 말했었다. 아무것도 아닌 작품을 쓰는 것, 가치 없음으로 가치를 지니게 되는 소설, 즉 절대적인 무의미를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발표한 신작 소설 《중얼거리다》는 작가 정영문이 도달하고자 하는 그 절대적인 무의미의 지점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정영문의 소설 《중얼거리다》는 제목 자체가 그의 소설형식을 그대로 말해준다. 말 그대로 주인공은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중얼거린다'. 이 작품은, 서사는 온데간데없고 끝없이 이어지는 무의미한 대화와 중얼거림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중얼거리다》는 한 편의 희곡처럼 읽히며,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소설은 왕과 다른 등장인물이 나누는 대화 그리고 왕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고, 전통적인 형식의 소설들처럼 시대적 배경이나 공간적 배경, 등장인물의 심리나 주변환경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김태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영문은 소설을 쓴다. 하지만 그는 소설을 쓰되 희곡적으로 쓴다. 정영문은 이 희곡적 소설을 통해, 내면 묘사를 할 수 없다는 희곡의 장르적 특성을 극단화시킨다.\"
《중얼거리다》는 늦은 오후 시간, 어느 왕의 침실에서 이루어진 대화와 왕의 중얼거림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주인공 왕은 늙고 병들고 정신마저 다소 이상해진 왕이다. 그는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허리를 다치고 두 다리를 못 쓰게 되자 항상 침대에만 누워 있다. 그래서 이제 왕에게는 육체적 힘도 정치적 힘도 없다. 아무런 힘도 없는 왕은 사람들에게 잊힌 채 중얼거린다.
내가 요즘 들어 진지하게 숙고하고 있는 것이 바로 유희의 문제야. 필요와 당위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절대적 자유라는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자유와 직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의 중요한 한 요소로서의. (...) 어쨌든 유희의 문제는 평생 내가 고민해온 문제야. 그리고 그것은 계속해서 고민해야 할 숙제이기도 해.(14쪽)
이처럼 왕은 혼자 침대에 누워 소리내어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독백은 희곡의 독백처럼 주인공의 내면상태를 드러내는 수단이 아니다. 소설에서는 독백이 아니라 따로 존재하는 화자가 이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소설의 화자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결국 독자가 독백을 통해 주인공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일 뿐이다. 진짜 내면은 드러나지 않은 채이다. \"왕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이때 진짜 왕이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화자는 알려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왕은 혼자 있을 때도 끊임없이(잠시 생각에 잠기는 때를 제외하고) 중얼거리고, 누군가가 그를 찾아오면 또 끊임없이 중얼거린다. 그리고 왕은 누군가가 왕위 찬탈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는 않는다. 그는 침대에서 누웠다 일어나는 것 외에는 전혀 움직이지도 않고 대화를 통해 어떤 의미나 의사소통을 추구하지도 않고 그저 죽은 시체처럼 가만히 있을 뿐이다. 이 작품에는 왕, 광대, 시종, 시녀, 왕비가 등장한다. 보통의 소설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인물들이다(역사소설이 아닌 한). 이러한 인물 구성 역시 이 작품의 희곡적인 특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희곡 중에서도 비극에서는 등장인물의 신분적 위계질서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신분은 인물의 내적 본질을 반영하는 외적 표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인물의 신분과 내적 본질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실제 왕으로서의 역할은 없고 드라마 속의 왕의 역할밖에는 없는 거야. 나는 그 드라마 속의 나의 역할을 떠나서는 나를 생각할 수가 없어. 나는 극중 인물로만 존재하지.\"라고 중얼거리는 왕은 결코 왕다운 왕이 아니다. 이처럼 왕이 왕다운 왕이 아니듯이, 나머지 등장인물들도 마찬가지다. 광대는 남을 웃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시종은 왕이 묻는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고, 시녀는 왕에게 뜨개질거리를 던져줄 뿐이며, 왕비 역시 왕이 아픈 것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그(정영문)는 전통적인 희곡의 관행을 패러디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독백이라는 희곡적 장치를 사용하면서 그러한 규정의 가치를 전도시킨 것처럼, 신분과 역할을 나타내는 규정을 사용하면서 그러한 규정의 의미 내용을 공허하게 만든다.\"라는 문학평론가 김태환의 말처럼 이 작품은 전통적인 희곡의 형식을 소설에 패러디함으로써 모든 의미가 탈각된 순수한 사물적 존재의 세계 속으로 침참해 들어간다. 그리고 그 무의미의 세계에서 진정한 존재감을 느끼게 해준다.
저자 소개
지은이 정영문
1965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나 서울대 심리학과를 졸업했다. 1996년 『작가세계』 겨울호에 장편소설 《겨우 존재하는 인간》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99년 《검은 이야기 사슬》로 제12회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작품으로는 소설집 《검은 이야기 사슬》《나를 두둔하는 악마에 대한 불온한 이야기》《더없이 어렴풋한 일요일》, 장편소설 《핏기 없는 독백》, 중편소설 《하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