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여인과의 사랑, 협객과 협녀, 바닷속 신선세계 등 중국 각지의 민담과 설화를 채록한 소설집으로, 이전 시대의 소설보다 주제나 구성, 문체 면에서 한층 성숙한 형태를 보인다. 또한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신화와 도교적 색채는 중국 당나라는 물론 고대 동아시아 세계가 공유한 이야기들의 사상적 근원을 짐작케 해준다.
출판사 서평
《전기》에는 고대 동아시아 상상력의 중요한 원천인 신화와 도교를 바탕으로 중세인들의 욕망과 감정, 사랑과 모험, 구도 행위 등이 환상적인 필치로 담겨 있다. 우리는 《전기》를 통해 동아시아 상상?력의 고유한 내용을 확인하고, 서양의 신화와 마법 이야기가 범람하는 오늘의 편향된 상상력에 균형을 잡아볼 수 있다. - 중에서
21세기의 우리가 일상에서 벗어난 이야기들에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을 갖는 것처럼, 중국 당나라 사람들 역시 비일상성(非日常性)의 유희를 즐겼다. 그들은 이 비일상적인 것들을 ‘기(奇)’라고 일컬었다. ‘...
《전기》에는 고대 동아시아 상상력의 중요한 원천인 신화와 도교를 바탕으로 중세인들의 욕망과 감정, 사랑과 모험, 구도 행위 등이 환상적인 필치로 담겨 있다. 우리는 《전기》를 통해 동아시아 상상력의 고유한 내용을 확인하고, 서양의 신화와 마법 이야기가 범람하는 오늘의 편향된 상상력에 균형을 잡아볼 수 있다. - 중에서
21세기의 우리가 일상에서 벗어난 이야기들에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을 갖는 것처럼, 중국 당나라 사람들 역시 비일상성(非日常性)의 유희를 즐겼다. 그들은 이 비일상적인 것들을 ‘기(奇)’라고 일컬었다. ‘기’는 ‘정(正)’이 아닌 것이었다. 즉 가지런한 일상을 벗어난 놀랍고 특이하고 우연한 것, 현실이 아닌 초현실에 속한 것, 역사서와 경전(經典)의 지식이 아닌 변두리의 지식이었다. 이 책의 제목이자 ‘기이한 일들을 전하다’라는 뜻의 전기(傳奇)는 바로 이러한 비일상적인 사회문화적 배경에서 만들어진 서사이다.
당나라 시대는 과거 중국의 어느 왕조보다도 ‘기’에 대한 관심이 넘치던 시대였다. 당시는 동아시아 공통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유교뿐 아니라 불교, 도교가 서로 팽팽하게 힘을 겨루었던 까닭에, 유교의 엄정함과 공식성 아래 불교와 도교가 지닌 또 다른 에너지가 넘실대던 시대였다. 그 전까지 여성들에게 요구되었던 정절(貞節)의 덕목이 효력을 잃은 듯 황실의 여성들은 재혼에 삼혼을 거듭했고, 황제가 불사약(不死葯)의 복용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수은 중독으로 죽는 일도 있었다. 일반인들도 불로장생을 위해 신선술(神仙術)에 탐닉했다. 이 같은 일탈의 에너지는 곧 ‘기이한 이야기’를 창작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전기》는 바로 그 한가운데서 탄생한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고대 동아시아의 환상 서사를 만나다
이 책에는 원숭이 아내, 물고기가 둔갑한 미인, 협객(俠客)과 협녀(俠女), 바닷속 신선국, 동굴 속 낙원 등 기이한 소재와 신화적 상상력을 취한 서른한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들 각각의 이야기는 신분, 성별, 재산 등 일상을 휘감고 있는 굴레들 안에서 꿈틀거리는 일탈의 욕망을 조심스럽게 꺼내놓는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소망들을 환상적으로 풀어낸 이 이야기들은 우리의 갑갑한 가슴을 시원하게 열어주고, 초라한 어깨를 따스하게 감싸 안는다.
아름다운 여성과의 사랑을 꿈꾸던 당대 남성의 욕망은 여자 귀신이나 선녀와의 만남으로 변형되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불사(不死)와 이상향(理想鄕)에 대한 욕망은 초인적인 도술(道術)이나 신선국, 용궁, 동굴 속 낙원 등 또 다른 세계의 설정을 통해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중심이 되고자 하는 중국의 서사와 그에 포섭되기를 거부하는 변방(중국 내 소수민족이나 베트남)의 서사가 충돌하는 모습, 용이 상징하는 수호(守護)와 재생(再生)의 이미지, 여성이 지니는 환상, 주술, 음(陰)의 속성 등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태어나 변형되고 공유되는 문화적 요소들의 원형과 실체를 만나는 즐거움도 안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기이한 이야기를 읽는 맛과 그 의미를 살피는 지적 즐거움을 함께 선사한다는 것이다. 중국 고전문학을 연구하는 소장학자 최진아 씨는 이 서른한 편의 이야기를 현대어로 맛깔스럽게 풀어쓴 후 각각의 이야기마다 흥미로운 해설을 덧붙였다. 예를 들어, 요괴나 귀신이 대개 여성으로 나타나는 이유를 여성학적 관점에서 탐구하고, 베트남의 서사가 중국의 서사에 편입되는 과정을 추적하며 얼마 전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중화주의적 역사관에 문제를 제기한다. 또 고대 협녀의 이미지가 영화 에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밝히고, 남성을 홀리는 요괴 여성의 이미지에서 팜므 파탈의 원형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처럼 이 책은 현대의 영화와 소설 등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해석을 통해 수백 년 동안 우리 삶을 지탱해온 이야기의 힘과 그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펼쳐 보이고 있다.
2. 출간 의의
욕망의 문학, 그것은 부재와 상실로서 경험되는 것이 무엇인지 탐구한다. 환상은 욕망을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한다. 환상은 욕망을 드러내거나 보여줌으로써 욕망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또한 욕망이 문화적 질서와 지속성을 교란시킬 때, 환상은 그러한 욕망을 배출한다. 많은 경우에 환상문학은 두 기능을 동시에 수행한다. 욕망은 ‘이야기됨’으로써 ‘배출’되고 따라서 작가와 독자가 그 욕망을 대리적으로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환상은 문화적 질서의 근본 토대를 지적하거나 제안한다. 환상문학은 잠시 동안이나마 무질서와 무법을 향해, 법과 지배적 가치체계의 바깥에 놓여 있는 것들을 향해 열려 있기 때문이다. 환상은 언급되지도 않은 문화, 보이지도 않던 문화를 추적한다. 즉 침묵하고 있던 문화, 보이지 않게 만든 문화, 가려졌던 문화, ‘부재’하게 만든 문화를 추적한다.
- 캐스린 흄, 《환상과 미메시스》 중에서
우리는 언제나 일상적이지 않은 사건에 관심이 많다. 귀신이나 UFO가 나타났다는 이야기, 평범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는 어느 로맨티스트의 이야기 등에 귀가 쫑긋해진다.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이러한 주제들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지만 우리는 기꺼이 그것들을 소비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일상에서의 일탈이야말로 인류 역사의 원동력이라는 누군가의 말이 거짓은 아닌 게 분명하다.
이렇게 일상의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 정상이 아닌 것, 종잡을 수 없는 황당한 생각 등을 우리는 환상이라고 부른다. 환상은 인간이 사회를 형성하고, 제도를 만들고, 정해진 틀 속에서 살아가기 시작한 이래로 줄곧 우리 곁에 존재해왔다. 그것은 언제나 사회적 규범과 질서에 틈새를 만들고, 엄연한 현실적 가치들에 균열을 내고자 한다. 그 미세한 틈새와 균열이야말로 인간이 거대한 사회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일종의 해방구가 아닐까? 환상을 통해 인간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욕망들을 적절히 배출하면서 일상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지켜내기 때문이다. 환상은 또한 우회적인 방식으로 진실을 말한다.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도 우리가 진실을 모르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여러 가지 굴레와 감투 속에서 벙어리 냉가슴 앓듯 괴로워하는 우리가 손을 내밀 수 있는 대상이 바로 환상인 것이다.
일상을 지탱하는 기이한 상상력과 일탈의 에너지
전통적으로 환상은 부정적인 것 혹은 주변적인 것으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이성의 시대가 낳은 폐단들이 분명해진 현대 사회에서 환상은 일종의 대안적 가치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또한 어느덧 우리 일상의 대부분을 점하게 된 사이버 문화와 ‘또 하나의 세계’를 정교하게 구현한 대형 판타지 영화들은 숨겨진 욕망을 배출하는 환상의 기능을 전면으로 끌어올렸다. 환상은 더 이상 일상 너머에서 즐기는 짧은 해방감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과 뒤섞인 채 일상을 직접적으로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따라서 이제 환상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고, 그 구체적인 기능과 문화적 의의를 면밀히 탐구할 필요성이 제기된다고 할 것이다. ‘전기’에 관한 한 국내 최고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최진아 씨는 자신의 박사논문 에서 다룬 ‘환상성’의 논의를 발전시켜 고대 동아시아의 환상 서사가 오늘날에까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를 고대와 현대를 오가며 유기적으로 분석해내고 있다. 그의 이번 작업은 고전이 담고 있는 의미를 현대에 충실히 재현하여 이러한 환상을 낳는 우리 상상력의 정체성을 일깨우고, 그 내용을 풍부하게 하는 데

목차
추천의 글
서문
1. 손각 : 원숭이 아내 - 요괴 여성, 팜므 파탈의 원형
2. 곤륜노 : 협객 미륵 이야기 - 협객, 문인의 또 다른 얼굴
3. 정덕린 : 강물 따라 맺은 사랑 - 고대 동아시아인들의 운명론
4. 최?위 : 무덤 속에 떨어진 사나이 - 중화주의를 넘어서
5. 섭은랑 : 신출귀몰 협녀 이야기 - 나성의 이중적 욕망을 들추다
6. 허서암 : 동굴 속 낙원 - 유토피아에 나타난 신화적 자유
7. 위자동 : 신선이 되기 위한 세 번의 시험 - 금기, 인간적인 욕망의 시험대
8. 주한 : 우물 속에 숨은 용 - 용, 동아시아인들의 숭배와 탐구의 대상
9. 번부인 : 도술로 백성을 구한 여인 - 도교의 여성적 원리
10. 설소 : 미녀들과의 하룻밤 - 일탈을 꿈꾸던 동아시아의 남성 지식인들
11. 원류이공 : 바다 가운데의 신선국 - 불완전한 인간의 완전성에 대한 욕망
12. 진난봉 : 번개신과의 대결 - 새로운 우사의 탄생
13. 고욱 : 물고기가 둔갑한 미인 - 중국 서사와 베트남 서사의 관계
14. 배항 : 백 일 동안의 시험 - 자아실현의 내밀한 욕망을 찾아서
15. 장무파 : 용왕의 딸이 사랑한 사나이 - 용녀에 투영된 불사의 욕망
16. 마증 : 호랑이가 둔갑한 승려 - 외피의 주술적 힘
17. 봉척 : 선녀의 청혼을 거절한 서생 - 신성보다 인성을 중시한 당나라 사회
18. 장무 : 은혜 갚은 원숭이 - 의 풍자적 성격
19. 등갑 : 뱀과의 한판승 - 뱀, 원초적 공포의 대상
20. 조합 : 귀신을 도운 사나이 - 영혼의 두 층위, 혼과 백
21. 증계형 : 죽은 여인과의 사랑 - 귀신과의 연애 모티프
22. 소광 : 두 미인이 들려준 용 이야기 - 용을 통한 신화적 사유의 회복
23. 요곤 : 여우 아내 - 여우는 왜 항상 여성일까?
24. 문소 : 귀양 온 선녀 - 무능력한 남성들의 '아름다운' 판타지
25. 강수 : 용을 부르는 피리 - 인간과 대결하는 드래곤, 인간과 감응하는 용
26. 금강선 : 승려의 도술 - 불교의 도교의 만남
27. 노함 : 무덤 지키던 인형 - 아름다운 여성의 두 가지 얼굴
28. 안준 : 옛 미인들과의 하룻밤 - 이야기로 해소하는 금지된 욕망
29. 도윤이군 : 신선이 된 두 노인 - 동아시아 고전서사에 투영된 득선에의 욕망
30. 영인 : 두 반씨의 기 싸움 - 한자, 동아시아 역사와 문화의 결집체
31. 왕거정 : 호강이 가죽 - 변신과 둔갑의 원리, 접촉주술
원문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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