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의의


다양한 방식의 역사 접근 - 인터뷰와 르포, 분석과 전망

시민의 힘으로 32년 독재를 끌어내렸지만 3년 동안 대통령이 네 번 바뀌는 혼란을 겪은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의 수탈과 착취에 더해 계엄군 학살이 버젓이 자행되는 아쩨, 4백 년 식민지 역사를 털고 독립국이 되었지만 내분과 외압으로 얼룩진 동티모르, 49년 세계 최장기 군사 독재의 역사와 63년 최장기 소수민족 분쟁 기록을 동시에 떠안은 버마, 국제재판의 이름으로 학살 책임을 덮어 감추려는 강대국들의 음모가 판치는 캄보디아, 입헌군주제 77년 동안 성공한 쿠데타만 18회, 개헌 17회로 얼룩진 타이.
《현장은 역사다》의 중심축은 바로 그 역사적 현장에서 정문태가 타전했던 기사들이다. 그가 사건과 현장을 취재하면서 추적, 이해, 분석한 결과인 여러 형태의 기사―르포부터 인터뷰, 정세 분석―는 독자가 다양한 각도에서 사건을 이해하고 전체적인 맥락을 잡도록 해주는 역할을 한다.
여기에 각 장마다 각국의 현재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역사적 맥락과 앞날을 전망하는 글을 앞뒤로 새로 써넣어 이해를 도왔다. 이로써 개별적 뉴스· 사건을 넘어 사건들의 연결고리를 찾아 역사로서의 맥락을 치밀하고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밀도 있는 취재
자까르따와 방콕의 시위 군중 속에서, 아쩨 군사작전 학살의 주검 앞에서, 동티모르 딜리 독립 선포식장에서, 버마 국경의 반군 전선에서, 캄보디아 들판의 미군 불발탄 앞에서, 그는 현장의 긴박한 뉴스를 타전한다. 그러면서도 그가 주목하는 것은 사건의 표피가 아니라 사건을 불러온 실체다. 이를테면 그는 타이 선거를 통해 자본이 ‘표’로 또 권력으로 이어지는 자본주의 시대 선거민주주의의 허점과 더불어 친탁신·반탁신 시위에 휩쓸린 시민들이 본질적으로는 재벌 총수와 국왕이라는 두 자본가들의 싸움판에 들러리로 전락했음을 꼬집는다. 선거로 뽑은 총리를 내몬 쿠데타와 새 총리가 치명상을 입은 암살사건이 뒤엉킨 2006년 동티모르 권력다툼에서는 자원과 지역 패권을 둘러싼 미국·오스트레일리아·라인과 포르투갈·EU라인으로 나뉜 주변 강대국의 속셈과 개입을 밝혀낸다.

인터뷰
이 책에서 많은 부분(29개의 글)을 차지하는 인터뷰는 현장 기록과 어우러져 각국의 현대사를 읽는 중요한 장치이다. 압둘라만 와히드 인도네시아 대통령, 사나나 구스마오 동티모르 대통령, 훈 센 캄보디아 총리, 마하띠르 말레이시아 총리, 탁신 타이 총리 등 취재 당시 현직 최고 정치 지도자들과 마주 않은 저자의 질문과 국가 정치를 쥔 그이들의 대답 속에는 각국의 사회가 걸어온 길과 나아갈 방향이 그대로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민주깜뿌찌아 대통령이었던 키우 삼판 대통령과 총리였던 ‘브라더 넘버 투’ 누온 찌아 인터뷰에서는 독립에 성공했으나 수많은 인민을 죽음으로 몰고 간 크메르 루즈 혁명과 킬링 필드의 실체와 본질을 찾는다.


아시아가 겪은 역사, 그리고 그들의 새로운 가능성

혁명, 독재, 식민지, 독립, 쿠데타……. 우리가 세계사라는 이름으로 배운 서양의 역사에 등장하는 사건들이다. 그들에게는 이미 지나간, 말 그대로 역사다. 이런 사건들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벌어지는 곳이 바로 아시아다. 그리고 우리 역사에서도 불과 반 세기 남짓 동안 벌어졌던 장면이기도 하다.
《현장은 역사다》는 인도네시아, 아쩨, 동티모르, 버마,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타이 7개국의 현대사를 각각 시민, 식민지, 독립, 혁명, 국제사회, 개혁, 자본을 중심에 놓고 바라보았다. 물론 이 단어들은 반드시 그 국가에만 국한되는 개념이 아니다. 하지만 식민지를 경험한 거의 모두 국가· 지역이 겪는 민족 분쟁, 인종과 종교 분쟁, 민주화 문제, 빈곤 문제 등과 밀접하게 얽혀 있다는 점에서 특별히 아시아 역사를 살피는 데 유의미하다.
다만 가장 첨예하고 두드러진 현상이면서 동시에 가장 중요한 현안을 뽑아냄으로써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각 나라의 사회 변화를 보다 또렷하게 이해하도록 했다. 더불어 이들 동남아시아 7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안고 있는 공통적인 과제를 끄집어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 경험과 역사를 반추해볼 수 있다. 독재에 맞서 시민들이 일어난 인도네시아 자까르따의 1998년 5월은 1980년 대한민국 광주, 1992년 타이 방콕의 5월과 오버랩된다. 독립을 위해 싸웠던 이들이 독립정신에 따라 독립정부를 세웠다는 너무도 마땅하고 빛나는 역사를 이루었으나 강대국의 패싸움에 휘말린 동티모르의 오늘은 우리 현대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다시 보게 한다. 타이 최대재벌 총수 출신인 탁신과 최대 자본가인 국왕의 전장이 되어버린 타이 정치는 자본 아래 수렴된 정치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현장은 역사다》는 우리 역사가 아시아의 역사 안에 있으며,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그들의 길과 다를 수 없다는 상보적인 역사 이해와 함께 아시아 시민사회라는 보다 큰 역사적 시각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내용 소개

인도네시아 | 시민, 정치를 깨우다
인도네시아는 32년 독재 수하르또 대통령의 1998년 퇴진부터 3년 동안 하비비-와히드­메가와띠-유도요노로 대통령이 네 번 바뀌는 정치 격변의 현장이었다. 독재를 끌어내린 시민은 온데간데없고 정치판 기득권들의 끼리끼리 짝짓기, 야합, 합종연횡이 벌어졌다. 하지만 저자는 인도네시아가 진정한 시민사회로 나아갈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점친다. 나설 줄 아는 시민과 싸울 줄 아는 언론, 꼬집을 줄 아는 학계가 만만찮게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인도네시아가 아시아 정치 발전사에 중요한 모델이 될 가능성이 바로 시민의 힘에 있다고 말한다.

5월 17일, 도심은 아직 닫혀 있지만 폭동은 수그러들었고 버스와 택시들이 살살 다니고 있다. 그러나 하루 동안 외국인과 화교들 탈출이 극에 달했다.
자까르따 5월은 이제 뭔가 터질 것 같은 20일을 향해 가고 있다. 국민각성의 날이기도 한 그 20일에 맞춰 수하르또가 중대 발표를 할 것이란 소문이 도는 가운데 학생 시위대는 그날을 최후의 결전일로 꼽고 있다. 시민들은 학생(교내 시위자)과 폭도(가두 시위자)로 나눠 진압작전을 벌이겠다고 밝힌 군부의 움직임을 걱정스레 지켜보고 있다.
자까르따는, 1980년 5월 광주와 1992년 5월 방콕에 이어 다시 피를 부르며 아시아 현대사에 ‘5월’을 만들어가고 있다. 수하르또만이 그 피를 멈추게 할 수 있는 연장과 솜씨를 지녔다. 수하르또의 결단이 필요하다.
_<5월 자까르따, 희망은 있는가?>, 24쪽

유도요노가 지닌 이 모든 강점들은 양날의 칼이다. 대통령이 의회와 내각과 당을 모조리 주무를 수 있는 현실은 균형과 책임이라는 정치적 상식을 뛰어넘어 독재로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선택은 유도요노 몫이다. 그이가 정치판에 묶이지 않아도 되는 강점을 살린다는 건 결국 시민사회와 손잡는 일이다. 마지막 5년 동안 그이가 시민을 중심에 놓고, 시민이 바라는 ‘변화’를 따라간다면 인도네시아는 아시아 정치발전사에 중요한 모델을 남기게 될 것이다.
갈림길에 서 있다. 앞으로 5년은 인도네시아가 세계사의 중심으로 진입할 수 있는 기회이면서 동시에 더 험한 수렁으로 빠져버릴 수도 있는 위기의 시간이기도 하다.
_
<유도요노 연임, 기회인가 위기인가?>
, 92쪽






아쩨 | 식민지, 외로운 투쟁

아쩨는 포르투갈, 네덜란드, 일본 식민지에 이어 지금은 인도네시아의 식민지다. 세계 최대 액화천연가스전을 지닌 아쩨에서 인도네시아 정부는 모든 생산과 이윤을 자까르따로 실어 갔다. 그 결과 아쩨 시민 40%가 절대빈곤에 허덕여왔다. 식민지, 수탈, 빈곤이 뒤엉킨 질곡의 역사다. 저자가 현장의 참상을 타전했던 2003년 인도네시아의 아쩨전쟁 계엄군사작전 또한 수하르또 퇴진으로 날려버린 패권을 되찾려는 군부, 총선과 대선 득표 기회로 삼은 자까르따 정치판이 만들어낸 참극이었다. 2005년 쓰나미 이후 인도네시아-아쩨 평화회담의 물꼬가 트이긴 했지만 저자는 해묵은 불신과 사회적 긴장이 남아있는 한 아쩨에서 평화를 말하기 힘들다고 전망한다.



\u003d당신들이 바라는 아쩨 자유, 그 길이 무장투쟁뿐인가?

―지난 23년 동안 우린 정치, 외교로 아쩨 문제를 풀 수 있으리라 믿었다. 누구도 무장투쟁을 최선이라 여긴 적 없다. 나도 꿈 많던 학창시절 보냈다. 유학도 했다. 근데 문제는 인도네시아 정부와 군이다. 어머니와 누이가 죽임당하는 걸 보면서 총을 든 우리를 나무랄 수 있겠나? 당신 같으면 그런 걸 보고만 있겠는가? 아쩨에서 인도네시아군 물러가고 독립할 때까지 무장투쟁 계속할 것이다.

_무자낄 마나프(자유아쩨운동 지도자) 인터뷰, 96~97쪽



외국인 가운데 마지막까지 남아 아쩨를 취재해왔던 한국 시사주간지 〈한겨레21〉 정문태 기자가 본디 일정을 앞당겨 월요일 수마뜨라 메단으로 떠났다. 그가 정부군으로부터 압력을 받아 아쩨를 떠났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자까르따 포스트〉, 2003년 6월 24일

자까르따로 돌아온 나는 꼴 난 외국기자 하나가 아쩨 떠난 사실을 대문짝만하게 올린 현지 신문들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나는 그 기사를 날린 동료들 마음을 읽었다. 떠나기 전날까지 한데 어울리며 내가 왜 아쩨를 떠났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그이들은 그렇게라도 정부군 언론통제 사실을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쩨 계엄 군사작전, 지금까지 크고 작은 전쟁과 전선 40여 개를 취재해왔지만 이토록 모진 언론통제를 겪은 적이 없었다.

_
<아쩨 일기 - 짧은 평화를 위한 긴 전쟁>
, 126쪽




동티모르 | 독립, 멋진 신세계

동티모르는 4백 년 식민지 역사를 걷어내고 21세기 첫 독립국으로 역사에 남았다. 저자는 독립 찬반 투표, 제헌의회 선거, 독립 선포식으로 이어진 독립 공화국을 향한 동티모르의 행로를 꼼꼼하게 담아냈다. 그러나 정치 통합 경험이 없는 동티모르는 독립의 기쁨을 뒤로 하고 불거진 독립영웅들 사이의 권력투쟁, 티모르 해 유전을 노린 오스트레일리아·포르투갈의 압력 등 분열의 전통을 되풀이하고 있다.



“동티모르 정체를 대통령제와 내각제 가운데 어느 쪽으로?”

그이의 정치적 야망을 캐보고자 독립정부 구성안을 물었더니, “시민들이 결정할 일”이라면서도 “개인적으로는 대통령중심제가 옳다고 본다. 강력한 지도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 강력한 지도력이 당신을 뜻하는가?”

“꼭 내가 정치지도자가 돼야 한다고 생각해본 적 없다. 내가 대통령 할 만한 인물도 아니고, 독립한 내 나라에서 호박 농사나 지으며 살고 싶다.”며 또 한바탕 소리 내 웃었다.

하긴, 감옥에서도 호박을 키웠으니 진짜 호박 농사꾼이 되겠다는 건지 알 수 없지만, 그런 일이 결코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운명’ 같은 걸 스스로 예감하는 웃음이었다.

_사나나 구스마오(동티모르 대통령) 인터뷰, 174쪽



(2006년) 5월 , 동티모르 정부는 정규군 1,400여 명 가운데 600여 명이 달아나 반란군에 합세하자 오스트레일리아, 포르투갈, 말레이시아 정부에 군대를 보내달라고 매달렸다. 그러자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동티모르 정부를 도와 시민 안전을 지키고자 군대를 보낸다.’고 밝혔다. 따라서 오스트레일리아 정부가 지킬 ‘중립’은 없다. 앞뒤 가릴 것 없이 반란군을 결딴내서 동티모르 정부를 돕고 날뛰는 아이들을 다잡아 시민 안전을 지켜야 한다.

오스트레일리아군이 동티모르 정부와 반란군 사이에서 ‘중립’을 외치는 건 ‘야심’이 따로 있다는 뜻이다.

마주치는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들에게 물어본다.

“누가 너희들 적이냐?”

“없다.”

“그러면 전선은 어디냐?”

“없다.”

중무장 화기를 동원해 작전 중인 군인이 ‘적’도 없고 ‘전선’도 없다. 근데 그 최정예 중무장 공격용 부대는 남의 나라 정부 기능을 접수했다. 이런 결 흔히 ‘침략군'이라 부른다.

_
<제국의 침략, 쿠데타의 그늘>
, 223쪽






버마 | 혁명, 세월에 갇히다

버마는 49년 세계 최장기 군사 독재, 63년 최장기 소수민족 분쟁 기록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 책에는 1994년 버마-타이 국경 민족해방·민주혁명 전선 소식부터 2007년 불발로 끝난 승복혁명까지 혁명을 향해 내딛는 버마의 힘겨운 여정을 담았다. 저자는 버마의 민주화운동 동력이 ‘아웅산 수찌’에서 시민으로 옮겨가고 민족해방·민주혁명 세력들이 외세개입 요구를 접고 홀로 서겠다는 의지를 보인다면, 혁명은 불가능하지 않다고 전망한다.



\u003d민주혁명, 민족해방 전선은 당신에게 큰 기대 걸고 있다. 무장투쟁 벌이고 있는 8888 항쟁 주역들인 버마학생민주전선과 버마민주동맹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나?

―(아주 매몰차게) 나는 그 학생들에게 국경으로 가라 한 적 없다. 떠나는 게 문제 해결 방법 아니라고도 했다. 무장투쟁은 우리 노선 아니다. 난 처음부터 비폭력 노선 내걸었다. 그 학생들에게 보낼 수 있는 메시지는 고향으로 돌아와 함께 버마를 만들어가자는 것이다. 버마민주동맹 같은 민주혁명, 민족해방 단체들에게는 버마 앞날이 통합에 달렸다는 뜻을 전하고 싶다. 나는 그이들 돕겠다는 약속을 반드시 지킬 것이다. (여기서 인터뷰가 한참 끊겼다. 버마학생민주전선 무장투쟁을 놓고 서로 핏대를 올린 데다, 그이에게 국경 전선 상황을 설명했던 탓이다. 이미 분위기는 깨졌다.)

_아웅산 수찌(버마 민주화운동 지도자) 인터뷰, 289쪽



분쟁 61년도, 독재 47년도 모두 민주화에서부터 풀어나가야 할 일이란 걸 모르는 이가 없다. 그러나 버마는 아직도 20세기 초 식민시대를 살고 있다. 군인 독재를 경험했던 아시아의 모든 나라들이 시민사회를 향해 달려가면서 인본주의를 말하고 있는 이 21세기에도. (……)

독재자들과 손을 끊고 다시 일어선다면, 만약 민주화운동 동력이 ‘아웅산 수찌’라는 이름에서 시민의 이름으로 옮겨간다면, 만약 민족민주동맹이 외세개입 요구를 접고 홀로 서겠다는 의지를 보인다면, 그리하여 랭군과 국경에 통일전선이 세워지고 버마 안팎에서 수많은 이들이 민주투쟁에 힘을 보탠다면, 그 ‘2년’짜리 꿈을 다시 되살려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보고 싶다. 하루 빨리 버마 문제를 풀어내고, 이름 하여 ‘버마 모델(Bur mese model)’ 풀는 용어를 만들어내고, 그 본보기를 좇아 여전 버아시아 사회의 기본모순인 ‘민족 문제’와 ‘민주화 문제’를 아시아 시민사회가 함께 헤쳐 나가는 모습을.

_<20년 세월에 갇혀버린 2년 짜리 희망,>, 263쪽

캄보디아 | 국제사회, 역사를 재단하다

캄보디아는 킬링필드, 크메르 루즈, 뽈 ? 등 지나간 역사에 발목이 잡혀 있다. 이를 털어내기 위해서 인민학살 전모를 파헤치고 해코지한 이들에게 책임을 지우고 희생자를 보듬고 기록을 남기는 일이 필요하다. 저자는 민주깜뿌찌아 혁명 주체들과 인터뷰를 통해 캄보디아 현대사에서 처음으로 독립 정부를 세웠지만 수많은 인민을 죽음으로 내몬 주체 가운데 하나로서 크메르 루즈의 책임을 묻는다. 하지만 저자는 크메르 루즈를 단죄하겠다면, 1969~1973년 불법 폭격으로 캄보디아 인민 60~80만 명을 학살한 미국을 비롯해 식민주의자 프랑스, 침략자 베트남 그리고 크메르 루즈를 도왔던 중국과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을 한 법정에 세워 사실을 밝혀내야 한다고 말한다.



\u003d주권과 인권이 부딪치면 어떤 걸 먼저 택해야 한다고 믿나?

―그 둘은 서로를 받쳐주는,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하는 쌍둥이 가치야.

\u003d그게 내가 본 깜뿌찌아공산당 역사의 충돌점이다. 깜뿌찌아공산당은 이상과 현실 맞추지 못했다. 주권 좇아 인권 버렸던 게 결국 대량학살 낳았다.

―혁명을 평화 때 눈길로는 바로 보기 힘들어. 우리가 해방전쟁 하던 땐 나라 앞세워 총 들고 싸우는 게 최고 가치였다. 그 길에서 희생자도 났고.

_누온 찌아(민주깜뿌찌아 총리) 인터뷰, 384쪽



국제사회가 돈까지 대며 일일이 간섭하는 재판에서 ‘국제’가 빠진 대목을 눈여겨볼 만하다. 이 특별재판소 설치법은 제목에서 크메르 루즈가 집권했던 ‘민주깜뿌찌아’ 기간을 또렷이 못 박은 것도 모자라 제1장 총칙과 제2장 권한에 무려 8번씩이나 ‘특별재판소는…… 1975년 4월 17일부터 1979년 1월 6일까지 기간을 다룬다.’고 겹겹이 쐐기를 박아두었다.

이건 단 하루도 빼고 더함이 없이 딱 크메르 루즈 집권기간만을 재판하겠다는 뜻이다.

그렇게 해서 미국은 1969~1973년 폭탄 539,129톤을 떨어뜨려 캄보디아 인민 60~80만 명을 학살한 책임으로부터 빠져나갔다. 그렇게 해서 미국은 크메르 루즈의 반미해방투쟁 직접 원인이 된 1970년 CIA의 론 놀 쿠데타 공작 책임으로부터도, 크메르 루즈 집권기간 동안 국제 구호단체들의 캄보디아 지원을 막아 수많은 인민들을 굶어죽게 한 책임으로부터도, 1980년대 크메르 루즈에게 8천5백만 달러어치 무기를 건네준 사실로부터도 달아나버렸다.

미국뿐 아니다. 1980년대 해마다 크메르 루즈에게 1억 달러어치 무기를 제공했던 중국을 비롯해 영국과 유럽 국가들도 모조리 역사로부터 도망쳐버렸다.

_
<캄보디아특별재판, 반역이다>
, 405~407쪽






말레이시아 | 개혁,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1957년 독립 때부터 한 번도 정권을 내놓지 않았던 여당연합체 국민전선 대신 2008년 선거에서 야당연합 민중동맹이 13개 주정부 가운데 5개를 거머쥐었다. 말레이시아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야당’이라는 용어를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로써 말레이시아는 뒤늦게 비로소 개혁의 길로 접어들었다. 저자는 아직 갈 길이 험하고 멀지만, 누구도 압도적 다수를 휘두를 수 없는 시민중심 사회를 향한 아시아의 실험의 다음 순서가 바로 말레이시아라고 전망한다.



\u003d그러면 총리 22년 동안 흠집을 남긴 족벌주의나 부패 같은 건 어떻게 생각하나?

―족벌주의 부패로 나를 욕하는 건 받아들일 수 없다. 내가 택한 이들이 성공하면 모조리 족벌 꼬리표 붙였는데, 그이들이 모두 실패해야 한다는 논리인가? 그게 다 실패하면 신경제정책도 끝장날 수밖에 없다. (……) 부패 척결, 안 한 적도 흘려 넘긴 적도 없다. 족쳐왔지만, 또렷한 증거 잡기 어려웠다. (……)

\u003d말이 난 김에, 이 열린 세상에 당신은 아직 국가보안법이 필요하다고 믿는가?

―보안법은 예방법이다. 누군가 국민을 죽이거나 국가를 흔들어댈 가능성 있다면, 범죄 전에 막는다는 뜻이다. 근데 사전에 그 증거를 법정에서 밝히기가 어려우니 예방법은 법원으로 가지 않을 뿐이다.

\u003d인권 유린과 권력 남용이라 욕먹어왔는데도?

―증거, 조사 다 거쳤다. 변호사와 인권단체도 만나게 했다. 정부는 6개월마다 재조사한다. 문제없으면 풀어준다. 선진국들은 법 없이도 체포, 감금해왔다. 미국이 탈레반 불법 체포, 감금해온 관타나모 미군기지 봐라. (……)

_
<물러난 마하티르, 집권 22년을 말하다>
, 421~422쪽






타이 | 자본, 정치를 삼키다

타이는 외형적 현대화와 달리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봉건적 자본주의체제를 지녔다. 저자는 타이 정치를 읽는 핵심어가 ‘군인’과 ‘자본 관계’라고 분석한다. 2001년 최대 재벌 친 그룹 총수 탁신 친나왓 총리가 정점이었다. 탁신은 민족주의를 덧칠한 포퓰리즘을 퍼트리며 빈곤층을 끌어들인 뒤 사회 모든 분야를 움켜잡고 단기간에 독점적 자본 증식을 해나가면서 전통적으로 자본 정점에 있던 입헌군주체제와 부딪쳤다. 저자는 양쪽 모두가 때로는 ‘혁명’을 흉내 내고 ‘민중’을 팔아먹기도 하면서 ‘민주주의’를 외치지만 본질은 바로 ‘자본 충돌’과 ‘자본 대리전’이라고 분석한다.



타이 정치가 외형상 민주화를 이뤄가던 1990년대는 아시아 전역에서도 시민사회가 크게 자라면서 쿠데타와 군인정치가 한물갔다. 대신 자본가들이 정치판에 뛰어들어 권력까지 노리는 현상이 세계적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같은 시기, 타이 군인들도 정치권력에서 발을 빼는 대신 자본에 빌붙어 이윤을 챙기는 기생법에 눈떴다.

해서 1991년 쿠데타를 끝으로 모든 이들이 ‘이제 타이에서 쿠데타는 더 이상 없다.’고 단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자본을 끼고 온 군부가 있고, 타이 정치가 여전히 고질적 부패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근본 결함을 눈여겨보지 않은 지나친 낙관이었다.

타이 정치는 아직도 ‘매표’와 ‘뇌물’이라는 두 줏대를 통해 돌고 있다. 선거를 돈으로 산 정치인들이 정부 예산과 사업권으로 이문을 챙기고는 그 돈으로 다시 다음 선거를 치르는 구조는 오히려 1980~1990년대 경제발전과 맞물려 더 악질로 변했다.

‘돈줄’과 ‘부패’가 살아 있는 한 권력을 향한 군인들 의지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역사가 증명해왔다. 그 부패구조를 확대 재생산하는 악순환에 동력을 제공해왔던 주범인 쿠데타 군인들이 늘 ‘최후의 선택’이라며 부패정치 척결을 혁명과업 제1호로 내걸었던 사실을 눈여겨봐둘 필요가 있다.

_
<타이 정치 읽기 전초전>
, 445쪽



\u003d근데 왜 고발당했는가?

―돈이 너무 많아서. 사업 성공한 사람은 정치하지 말라는 거다. 누군가 내 돈을 뒤졌다. 반부패위원회는 부패 잡아내는 곳인데 내 돈은 깨끗하다. (……)

\u003d만약 당신 부패혐의가 불법 판정 받고 정치적 혼란 온다면, 누군가를 내세워야 하지 않겠나?

―나뿐이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나다.

\u003d당신이 경제 위기 끝낼 수 있다고 큰소리쳤지만 정책은 흐릿하다. 뾰족한 수가 있나?

―소비 늘리는 길이다. 너무 움츠러들었다. 그러자면 서민 놓고 경제 다뤄야 한다. 재무, 금융 구조조정만으로는 경제 위기 잡기 힘들다. 예컨대 돈 없어 농사 못 짓는 농민에게는 돈 줘서 농사짓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u003d너무 추상적이다. 이게 당신이 공약한 7만 개 마을에 1백만 바트(3천만 원)씩 주겠다는 건가? 갑자기 그 돈이 어디서 나오나, 당신 주머니 털어 도울 생각이라도 있나?

―30년 전 한국을 생각해봐라.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서 일어서지 않았나? 타이라고 못 할 것 같나? (……)

\u003d당신이 다음 정부 맡는다면 외교정책 뼈대는?

―외교란 본디 변화무쌍하다. 이제 국제적으로 외교란 건 경제 지원책과 같은 뜻으로 쓰고 있다. 바로 그게 뼈대다.

\u003d한국과는?

―경제다. 외교뿐 아니라 국가운영 초점이 경제다. 한국관계도 거기에 있다.

_탁신 친나왓(타이 총리) 인터뷰,
<차기 총리 자치가 보인다>
, 455~456쪽

인도네시아 | 시민, 정치를 깨우다
아쩨 | 식민지, 외로운 투쟁
동티모르 | 독립, 멋진 신세계
버마 | 혁명, 세월에 갇히다
캄보디아 | 국제사회, 역사를 재단하다
말레이시아 | 개혁,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타이 | 자본, 정치를 삼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