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구의 모나리자! 매혹하는, 동시에 매혹된 듯한 시선
17세기, 네덜란드는 말 그대로 ‘황금 시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세계 해상권의 제패와 식민지 개척으로 막대한 부가 네덜란드로 밀려들었다. 이러한 물질적 풍요를 바탕으로 예술 또한 화려하게 꽃을 피웠는데, 그 중심에 미술의 거장 렘브란트, 할스, 그리고 요하네스 베르메르가 있었다. 이들 중 유독 베르메르는 오랫동안 후세 사람들에게 베일에 싸인 화가로 남아 있었다. 그는 200여 년 간 거의 잊혀졌고, 재발견된 후에도 그의 작품의 진위 여부를 둘러싸고 수많은 논쟁이 벌어져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 신비의 화가 베르메르의 몇 안 되는 작품들 가운데서 가장 신비롭고 매력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북구의 모나리자’라는 별칭을 가진 '진주 귀고리 소녀'다. 살짝 입을 벌리고 반 넘어 고개를 돌린 채 우리를 응시하는 소녀의 초상은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미적 모호성의 한 극치를 보여준다. 소녀의 빛나는 두 눈은 순수한 듯도 하고 우리를 유혹하는 듯도 하다. 또 벌어진 입은 놀란 듯도 하고 무슨 말을 건네려는 듯도 하다. 머리에 두른 천은 이국적이고 갈색 옷은 커다란 진주 귀고리와 어울리지 않게 수수하다. 도대체 이 소녀는 누구인가? 어떻게 그림의 모델이 되었는가? 소녀는 우리를 응시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커다란 두 눈과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는 순수함인가 유혹하는 것인가? 어째서 소녀의 귀에는 진주 귀고리가 달려 있는가?
작가 트레이시 슈발리에는 소설 '진주 귀고리 소녀'에서 이 신비로운 그림 속 소녀에게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 세상의 햇살 아래로 불러내는 놀라운 소설적 상상력을 선보인다. 작가는 17세기 네덜란드 델프트의 일상 세계에 대한 치밀한 복원과 정확한 미술사적 지식, 그리고 화가 베르메르의 삶과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폭의 그림을 정점으로 한 촘촘하고도 다층적인 드라마를 빚어나간다. 이는 마치 밑바탕이 칠해지고 그 위에 여러 색이 거듭 덧칠된 뒤 마침내 점과 선과 면, 그리고 색과 빛이 하나로 어우러져 한 점의 그림으로 완성되는 과정을 보는 듯한 생동감과 경이감을 불러일으킨다.
작가가 묘사하는 델프트의 풍경은 작중 여주인공이자 일인칭 화자인 그리트의 시선 속에서 도드라진다. “델프트를 덮고 있는 회백색의 하늘은 이불처럼 마을 위로 내려와 있었다. 이런 하늘을 태워 날려버리려면 여름의 태양이 더 높이 솟아야 할 것이다. 길과 나란히 흐르는 운하는 초록색을 띤 하얀 거울 같았다. 해가 높이 떠오를수록 운하의 빛깔도 이끼처럼 더욱 짙어질 것이다.”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폭 좁은 벽돌집과 뾰족한 빨간 지붕, 초록빛 운하의 물길, 그리고 수문의 모습……”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이 먹고 마시고 입는 것들, 집 안과 시장과 길거리 풍경들이 또한 낱낱이 손에 잡힐 듯 묘사된다. 시장 광장에서는 사람들의 부산스러움과 소란스러움이, 푸줏간 시장에서는 피 냄새가, 가축 시장에서는 산 짐승들의 노린내가, 불이 지펴진 부엌에서는 고기 굽는 냄새와 그릇들이 부딪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뒷마당에서는 하얗게 빨래 말라가는 소리가 온 몸으로 그대로 느껴질 듯하다. 준비에 열흘이나 걸린 아기 탄생 축하잔치 풍경은 17세기 네덜란드의 풍속과 그들이 누렸던 화려한 ‘황금 시대’의 한 장관을 연출하기도 한다.
여기에 작가는 물감 재료들과 제작법, 빛과 카메라 옵스큐라의 활용, 인물과 배경의 배치 등 한 편의 그림이 탄생하기까지의 정밀한 보고서를 더해 넣는다. ‘양피지에 봉해져 작은 질그릇 단지 안에 들어 있는 상아, 매더(madder), 청금석, 단사(丹砂), 매시콧(massicot), 레드틴 옐로(lead-tin yellow), 골탄, 백연(白鉛) 등의 재료들과 돼지 오줌보 안에 소량씩 보관되어 있는 구하기 쉽지 않은 물감들’로 나열되는 물감과 재료들은 그 이름만으로도 낯설고 신기한 풍경이다. 재료를 막자로 곱게 갈고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 물로 거듭 씻고 여기에 아마인유를 섞어 순수하고 선명한 색을 만들어내는 물감 제작 과정도 흥미롭기는 마찬가지다. 여주인공 그리트가 카메라 옵스큐라를 처음으로 들여다보곤 사물들이 축소되고 거꾸로 비치는 모습에 겁을 집어먹고 “악마의 장난질”이라고 생각하는 장면은 웃음을 머금게 한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 상자가 어떻게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지, 그의 말에 대해 계속 되새겨봤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다”와 같은 대목은 “사람들은 구름이 하얗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구름 속에서 순전한 흰색을 찾기란 힘들”고 “벽은 흰색이 아니라 여러 가지 많은 색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림 속의 사물이 더 진짜 같다’는 새로운 발견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다른 눈으로 사물을 보는 화가의 세계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작가의 정확한 미술 지식을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또 다른 눈으로 그림을 느끼고 보게 하는 즐거움과 발견의 순간을 제공한다.

색채가 뿜어내는 눈부신 빛의 세계에 사로잡힌 한 소녀의 내밀한 초상
열여섯 살 난 타일 도장공의 딸 그리트는 폭발 사고로 아버지가 두 눈과 직업을 한꺼번에 잃자 가족의 생계를 위해 화가 베르메르 집의 하녀로 들어간다. 그리트가 할 일은 물건을 들어내고 청소를 하되 하나도 움직이지 않은 것처럼 완벽하게 제자리로 돌려놓으면서 화가의 화실을 청소하는 것이다. 물론 그리트에게는 빨래, 다림질, 청소, 장보기, 식사 준비, 옷 수선하기, 아이들 돌보기 등 다른 하녀의 일도 기다리고 있다. 그리트는 화실 청소와 집안일을 능숙히 처리해내는 솜씨를 발휘한다. 하지만 그녀의 내면에는 그림에 대한 재능과 빛의 세계를 향한 강렬한 열망이 숨겨져 있고, 이를 발견한 베르메르는 서서히 그녀를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이기 시작한다. 하녀와 주인으로 시작해 스승과 제자로, 그리고 화가와 모델, 남자와 여자로 발전해가는 두 사람의 관계는 아슬아슬하고도 감당하기 힘든 절정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진주 귀고리가 그리트의 귀에 매달리고, 베르메르가 그녀의 그림을 완성하는 순간 소설은 찬연한 빛을 뿌리며 폭발해간다.
이 책 말미에 실린 ‘작가 인터뷰’에서 트레이시 슈발리에는, 베르메르의 작품 속 인물들은 비밀스런 세계에 거주하는 듯 보이며, 그 이면에는 우리가 잘 파악할 수 없는 무수한 일들이 흐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고 말한다. 이 말대로 작가는 '진주 귀고리 소녀'의 그림자 지듯 어두운 배경으로부터 한 소녀의 운명과 예술(가)의 운명을 감지해내고, 이 두 운명이 만나는 순간의 밀도 높은 폭발력을 포착해낸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는 하녀의 삶, 여성의 일상, 반 라위번으로 대표되는 예술 후원가로서의 신흥 부르주아 계층과 예술(가)의 윤리, 반종교개혁기 구교와 신교의 대립 등의 층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이 소설은 1664, 1665, 1666년 그리고 10년 뒤인 1676년, 이렇게 단 4년 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짧은 시기 속에 베르메르의 전생애와 작품 세계, 나아가 17세기 델프트와 예술 세계의 전모가 집약되어 드러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슈발리에는 이렇게 말한다. “베르메르의 그림들은 방안의 세계를 드러내 보이죠. 이는 또한 이 소설이 구현하고자 하는 바이기도 해요. 소설은 의도적으로 좁혀지고 한 곳에 초점이 맞춰져 있죠. 그리고 그 안에 세계 전부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에서 작가가 보여주는 “독창적이고 명민한 솜씨”는 화가 베르메르의 독창성이자 명민함이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색채가 뿜어내는 눈부신 빛의 세계에 사로잡히지만 화가의 차가운 시선에 부딪쳐 끝내 자신의 세상으로 돌아오고 마는 한 소녀의 이 내밀한 초상은, 베르메르의 그림만큼이나 좀체 시선을 떼기 어려운 매력과 감동을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 이 책에는 원서에는 없는 몇 가지 자료들이 수록되어 있다. 우선 23점의 원색 도판이 실려 있다. 이 중 22점이 베르메르의 작품이고 한 점이 다른 화가의 작품이다. 베르메르의 그림은 모두 35점으로 알려져 있지만, 소설 내용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되는 작품만 가려서 실었다. 또한 작품의 이해를 돕기 위해 델프트 지도를 싣고 소설에서 언급되거나 중요한 장소를 표시하고 약간의 설명을 곁들였다. 아울러 책 말미에 ‘작가 인터뷰’를 실어 이 소설과 관련하여 궁금한 점들을 작가의 육성을 통해 들을 수 있도록 했다.

.한국어판 서문 ... 4
.베르메르가 살았던 델프트 ... 8

.1664 ... 11
.1665 ... 113
.1666 ... 215
.1676 ... 273

.옮긴이의 말 ... 294
.작가 인터뷰 ... 298
.수록 그림 목록 ... 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