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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머물렀던, 마음으로는 지금도 머물고 있는 장소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시인이 걸으며 만난 햇빛과 바람, 비와 구름
그 장소들과 순간들이 건네는 온기
자연과 인간은, 인간과 인간은 서로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 질문을 던져온 나희덕 시인. 산문집 『반통의 물』『저 불빛들을 기억해』『예술의 주름들』 이후 5년 만에 산문집 『마음의 장소』를 다시 펴냈다. 시인은 영국과 미국, 프랑스, 튀르키예 등 해외 여러 도시들부터 한국의 회산 백련지, 전주 한옥마을, 전남 백운동 별서정원, 소록도와 나로도 등 국내 곳곳을 천천히 걸으며 수많은 장소들을 만났고, 그곳에서 든 성찰들을 사진과 함께 책 속에 담았다.
“산책과 여행, 삶을 견디게 하는 두 가지.” 나희덕 시인에게 걷기란 곧 사람을 “품어주고 길러주”는 일이기에 시인은 스스로를 ‘산책자’라 표현한다. 생각이 흘러넘칠 때면 억지로라도 몸을 움직인다. 그럼 마음도 이내 두 다리를 따라 걷고, 그러다 우연히 생각이 멈추는 공간을 발견하게 마련이다. “걸음을 멈추고 오래 머무”르는 곳. 그 순간 ‘공간’은 ‘장소’가 되고, 그곳은 우리에게 ‘마음의 장소’로 남는다. “살면서 지치고 외로울 때 오랜 친구를 찾아가듯 몸과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이다.
“누구에게나 마음에 오래 남는 장소가 있다.”
런던과 뉴욕부터 전주와 강화, 고흥까지
시인이 만난 장소와 그곳에서 빚은 47편의 이야기
마음이 지쳤을 때 우리는 오랜 친구를 찾아가듯 어느 평화로운 장소를 떠올린다. 오래 머무르지 않았어도 깊이 남은 풍경들을,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 있는 자리들을, 굳이 스스로를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은 자리들을.
나희덕 시인은 연구년을 보냈던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학회와 행사를 위해 방문했던 프랑스 오베르뉴와 코스타리카, 여행으로 찾아간 튀르키예 앙카라와 카파도키아, 미국 시카고와 뉴욕의 거리에서 마음에 깊이 남을 장면들을 발견한다. 귀국한 후에도 시인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전주 한옥마을, 무안의 회산 백련지, 고흥의 소록도와 나로도 등 시인은 적요로운 한국의 거리 곳곳을 소중히 걸으며 두 눈에 담았다.
『예술의 주름들』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산문집 『마음의 장소』는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를 전체적으로 손보고 새로운 글을 더한 개정증보판이다. 시인은 『마음의 장소』를 준비하며 “여전히 길 위에서 서성거리는 저” 자신을 만났다고 고백한다. 한번 품은 장면은 시간이 지나도 바래지 않고 영원히 가슴속에서 빛난다. 『마음의 장소』는 나희덕 시인이 마음으로 오래 머물러온 장소들을 따라 걸으며 써내려간 산문집이다.
“그리운 장소들을 마음으로 다시 걸으며 여전히 길 위에서 서성거리는 저를 만나곤 했습니다. 그곳에서 당신과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_「서문」 중에서
목적도 해답도 요구하지 않는
‘산책’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지리학자 이푸-투안의 말을 빌려, 시인은 “우리의 경험과 감정, 삶의 흔적이 자연스럽게 녹아들 때 공간(space)은 비로소 장소(place)가 된다”고 말한다. 삶의 맥락이 투영되는 존재는 비단 인간과 문명만이 아니다. 햇빛과 바람, 비와 구름 같은 자연의 기척 또한 마음을 어루만지는 존재다.
시인은 버려진 소파에서 쓸쓸함을, 고장난 시곗바늘에서 시간의 무게를, 바닷바람에 휘어진 나무에게서 인간이 통과해야 할 고난을 느낀다. 하지만 고통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낡은 소파 품에서 자라나는 들풀은 생명의 요소를 깨닫게 해주었고, 기능을 멈춘 오래된 시계에게서는 오래된 신비로움을, 낮게 몸을 구부린 나무에게서는 겸허한 자세를 배웠다.
이렇게 시인은 산책을 통해 삶의 질문과 해답을 주고받으며, 그곳에서 잠시 몸을 누이고 마음을 위로받는다. 문득 발견한 이푸-투안의 말처럼 ‘공간’은 ‘장소’가 되고, 그 장소들이 시인을 쉬게 하고 다시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시인이 걷고 머무는 시간은 과거의 회상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연속성을 지닌 행위다. 이 책에서 걷기란 이동이나 도착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삶을 견디기” 위한 태도에 가깝다.
자연과 인간, 그 사이를 교차하는
시인의 질문들
『마음의 장소』에 등장하는 풍경과 인물들은 특별한 사건의 중심에 있지 않다. 하지만 그 일상적인 장면들은 시인의 시선을 통과하는 순간, 묵직한 삶의 질문들로 뻗어나간다.
비인간적 존재에게서는 인간이 짊어질 삶의 방향을 엿본다. 강물에 떠내려갈 듯 가볍게 둥지를 짓는 물새를 본 시인은 수많은 건물의 창문을 떠올리며 “인간이 대지에 뿌리내리”고자 하는 욕망에 대해 자문한다. 새로운 연꽃을 피우기 위해 마른 바닥을 드러낸 연못을 두고는 사람도 “안으로는 시들어가고 썩어가는 기억을 붙안고 싸워야” 함을 짐작한다. 백 년을 넘긴 물건 앞에서 그것에게 “영혼 같은 게 깃들어 있을 거라고” 믿으며, 그 신비를 해독하는 것이 “시인의 의무”임을 되새긴다.
한편 인간의 몸을 통해 비인간적 존재들과의 연대를 질문하기도 한다. 시인은 손 위로 날아든 새의 부리나 발톱이 지닌 감촉에 놀라며 “시인 노릇 헛했구나” 자연과 동떨어져 사는 자신과 문명을 반성한다. 빗속을 걸어가는 노인과 아이의 모습에서는 “늙은 자연이 어린 자연을 업고 가는” 장면이라 받아들이며, 벌거벗은 두 몸이 비에 온전히 자신을 내맡긴 그 처연한 광경에서 평화를 느낀다. 긴 세월 두루미를 관찰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새 한 마리가 하나의 세계”라는 사실에 숙연함을 느낀다.
이렇듯 『마음의 장소』의 문장들은 수많은 질문을 안고 있지만 결론을 서두르지 않는다. 문학이란 “삐걱거림 또는 파닥거림의 기록”이라 말하며, 나희덕 시인은 삶을 살아내고자 몸부림치는 그 모든 존재들을 끝까지 응시한다. 고통스럽지만 마음의 풍랑을 가라앉히기 위해 “귀를 막고 있던 밀랍”을 떼어내고 “몸을 묶고 있던 사슬”을 풀어내어야 한다고 중얼거리면서.
그러고는, 괴로운 시간을 잘 견디고 나면 우리가 무심히 지나쳐온 풍경과 사람들 속에 이미 마음을 내려놓을 자리가 마련되어 있음을 조용히 일러준다. 꽃이 져야 열매를 맺고, 열매가 썩어야 새로운 싹눈이 나듯 우리에게는 각자 걸음을 멈추고, 잠시 머물다 다시 걸어가기 위한 ‘마음의 장소’가 있다고.
모두에게 그러한 장소가 있음을 잊지 않도록, 시인 자신이 “머물렀고, 지금도 마음으로 머무르고 있는 장소들”에 독자를 초대하는 산문집 『마음의 장소』는, 언젠가 지치고 외로울 때 오랜 친구처럼 다시 찾게 될 한 권의 장소가 되어줄 것이다.

196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지훈문학상, 임화예술문학상, 미당문학상, 고산문학대상, 백석문학상, 영랑시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파일명 서정시』, 『가능주의자』, 『시와 물질』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 접시의 시』, 『문명의 바깥으로』, 산문집 『반통의 물』, 『저 불빛들을 기억해』,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예술의 주름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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