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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에서 프로이트까지,
철학과 정신분석을 통해 종말의 시대를 사유하다
팬데믹은 끝났지만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기후 위기와 생태계 붕괴, 전쟁과 지정학적 갈등, 경제적 불안과 사회적 분열 등 오늘날의 세계는 언제나 새로운 재난을 예고하며 우리를 불안 속에 머물게 만든다. 하지만 철학자 벤 웨어는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을 단순한 위기의 연속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종말을 두려워하는 일이 아니라, 종말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다.
칸트와 니체, 프로이트와 헤겔, 카프카와 브레히트, 드 사드에 이르기까지 철학과 정신분석, 정치사상을 가로지르며 ‘멸종(종말)’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해석한 『멸종하는 인간』이 출간되었다. 인간의 죽음뿐 아니라 사회의 붕괴, 자본주의, 혁명, 애도, 죽음충동, 반출생주의, 멸종 복원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주제를 넘나들며 현대 문명이 맞닥뜨린 위기를 하나의 거대한 철학적 지형 위에 펼쳐 보인다.
환경 위기와 전쟁, 경제적 불안과 사회적 분열이 일상이 된 오늘날, 이 책은 현대철학과 비판이론, 정신분석에 관심 있는 독자는 물론 동시대 사회를 보다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열어준다. 익숙한 종말 담론을 넘어 현재의 세계를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철학적 통찰을 만나게 될 것이다.
종말은 정말 끝인가,
아니면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기 위한 시작인가.
우리는 종말을 미래에 닥쳐올 사건이라고 단정한다. 언젠가 맞닥뜨리게 될 재난, 피할 수 없는 파국,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벤 웨어는 종말, 즉 인류의 끝을 단순히 피해야 할 미래의 재앙으로만 보지 말고 현실을 진단하는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종말을 예측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 끝에서 어떤 미래를 다시 상상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단순히 최악의 상황을 모면하려는 소극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기존의 사회적·경제적 질서가 끝났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토대 위에서 새로운 시작을 도모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끝없이 이어지는 다양한 위기 속에서 살아간다. 불안은 더 이상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라 삶을 지배하는 기본 감정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위기를 단순히 두려움이나 절망으로만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현재를 넘어설 가능성마저 잃게 된다. 따라서 이 책은 종말을 하나의 결말로서 바라보기보다 기존의 질서와 사고방식에 대해 다시 묻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철학적 계기로 바라본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종말 그 자체가 아니라,
종말을 외면하는 일이다
우리는 왜 끊임없이 종말을 소비하는가. 이 책이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언제 끝날 것인가’가 아닌 ‘끝 이후를 어떻게 상상할 것인가’다. “이미 늦었다”와 “늦은 만큼 당장 행동해야 한다”는 두 목소리 사이를 오가며 현재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는 어떤 정치와 어떤 사유가 필요한 것일까.
‘끝에서 다시 시작하기’란 막연한 희망을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익숙한 세계를 지탱해 온 가치와 믿음을 근본부터 다시 돌아보는 일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다른 시선으로 읽어내야 하는 일이다. 따라서 이 책은 종말(멸종)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통해 인간과 사회, 역사와 정치,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질문을 던지며 당연하게 여겨 온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도록 이끈다. 불확실성이 일상이 된 시대일수록 성급하게 내리는 해답보다 현실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생각의 힘이 필요하다. 《멸종하는 인간》은 종말과 멸종을 둘러싼 익숙한 담론을 넘어 오늘의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고 내일을 다시 설계할 수 있는 철학적 시야를 독자에게 선사한다.
킹스 칼리지 런던 철학예술센터 공동 소장이자 철학 선임연구원이다. 저서로 《Dialectic of the Ladder: Wittgenstein, the ‘Tractatus’ and Modernism》(Bloomsbury, 2015)과 《Living Wrong Life Rightly: Modernism, Ethics, and the Political Imagination》(Palgrave, 2017)이 있으며, 《Francis Bacon: Painting, Philosophy, Psychoanalysis》(Thames & Hudson, 2019)의 편집을 맡았다. 최근 《이플럭스 저널》, 《로스앤젤레스 리뷰 오브 북스》, 《ESP 매거진》 등에 에세이를 발표했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통역번역대학원을 졸업했다. 오랜 시간 영어 교육자의 자리에 있었고, 다양한 번역 작업과 더불어 스릴러와 인문, 여성 인권 관련 글을 주로 번역해 왔다. 영어와 책이라는 삶의 두 축을 번역이 이어주었듯 독자와 저자, 혹은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이어주는 교량과 같은 번역자가 되기를 꿈꾼다. 대표작으로는 《섀도 하우스》가 있다.
우리는 이러한 특정한 종말 환상을 숭고한 사건으로서의 종말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외부에서 폭력적으로 느닷없이 닥치는 장엄한 대재앙으로서의 종말이다. 우리 시대로 좁혀서 생각해 보자면, 지구의 전면적 파괴를 수반하는 이 종말론은 냉전 종식기에 일어난 광범위한 이념적 전환의 맥락 속에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_31쪽
멸종의 위협에서 살아남으려면,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공포와 불안을 감당하는 능력을 키우고 종말론적 인식을 길러야 한다. 안더스의 표현을 빌리면, “‘상상력을 확장하라’는 우리의 과제는 구체적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능력을 키우라’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는 공포 그 자체를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두려워할 용기를 가져야 하고, 나아가 타인에게도 그 두려움을 일깨워 줘야 한다.
_49쪽
사드의 저작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단순한 ‘쾌락’이 아니라, 쾌락원리를 넘어서는 죽음충동이다. 여기서 죽음충동은 주체가 ‘비유기적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일 뿐 아니라, ‘모든 존재의 총체적 멸종’과 자연의 생명 순환 과정의 파괴까지 포괄한다.
_93쪽
「오징어 게임」은 부채와 절망이 확산하는 현실을 드러내지만, 정작 자본주의 자체에 대해서는 어떤 비판도 제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작품은 겉으로는 문제를 제기하는 듯하면서도, 실제로는 악마적 속성에 가담해 그 체제의 논리를 더 증폭시킨다. 그렇다면 이 기묘한 이데올로기적 역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_115쪽
엔트로피 명제는 보편적 죽음충동 법칙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지구와 우주의 궁극적 멸종을 예고한다. 모든 고립계에는 소멸과 쇠퇴, 죽음으로 나아가는 비가역적 경향이 존재한다. 열역학 제2법칙이 전달하는 궁극적 파멸의 메시지는 전후 일부 비관적 사상이 오랫동안 엔트로피 개념에 매료된 이유를 어느 정도 설명해 준다.
_146쪽
생태적 반출생주의가 자연을 위해 우리 자신을 희생하라고 권유한다면, 멸종 복원론은 가속주의적 과학이 자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라고 요청한다. 이 두 입장은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듯 보이지만, 이데올로기적으로 비슷한 지점을 공유한다.
_179쪽
자본주의는 종말을 맞이할 수 있지만, 그것이 곧 우리 문제의 종결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더 살 만한 삶, 새로운 공동체적 삶의 양식을 향한 투쟁은 여전히 정치적 투쟁으로 남아 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다시 제기된다. 우리는 현재의 손상된 삶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가?
_245쪽
머리말
종말의 변증법
종말
종말의 여러 양상
원자론 철학
멸종을 직시하며
멸종 에피소드: 숭고에서 악마성까지
칸트적 지진
진실은 오래된 화석
멸종, 숭고, 그리고 혁명
자연의 도착적 변증법
도덕적 멸종의 역설들
악마적 자본주의
세상의 종말에서 마주하는 죽음충동
덧없음, 애도, 그리고 사라진 장면
죽음충동, 소멸, 엔트로피
죽음충동의 변증법
삶이라는 질병: 반출생주의에 대하여
죽음을 넘어서: 멸종 복원과 불멸
다시 시작하기 위해
끝에서 다시 시작하기
두 죽음 사이
시간과 멜랑콜리아
혁명적 탈창조
성자인가, 야만인인가?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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