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임진왜란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그 전쟁이 언제 시작되고 끝맺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 역시 거의 없을 것이다. 보편적으로 임진왜란은 결코 이순신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으며, 어떻게 보면 이순신을 위해서 임진왜란을 기억하게 되는 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이순신이라는 불패의 이름에 가려진 진실을 보았다. 이순신에 의해 존재했던 사실들을 각각의 독립된 구획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이순신은 그 전쟁의 주역 가운데 하나라는 것과 자신의 배역에 지나치게 충실했다는 것, 그 전쟁을 그저 ‘임진년에 왜놈들이 일으킨 亂’으로 격하...
임진왜란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그 전쟁이 언제 시작되고 끝맺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 역시 거의 없을 것이다. 보편적으로 임진왜란은 결코 이순신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으며, 어떻게 보면 이순신을 위해서 임진왜란을 기억하게 되는 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이순신이라는 불패의 이름에 가려진 진실을 보았다. 이순신에 의해 존재했던 사실들을 각각의 독립된 구획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이순신은 그 전쟁의 주역 가운데 하나라는 것과 자신의 배역에 지나치게 충실했다는 것, 그 전쟁을 그저 ‘임진년에 왜놈들이 일으킨 亂’으로 격하하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
1592년 늦봄부터 1598년 초겨울까지 한반도에서 격돌한 삼국의 全力은 실로 유례 없이 엄청난 것이었다. 우리는 임진왜란, 중원은 만력난(萬曆亂), 일본에서는 분로쿠(文祿), 게이초(慶長)의 역으로 불리는 7년 大戰은 동북아시아의 판도를 뿌리째 뒤흔들었다. 전쟁의 결과, 명나라가 힘을 잃어 주변의 제어력을 상실하자 중원의 동쪽 변방에서 누루하치(奴兒哈赤)라는 여진족의 영걸이 등장하여 청나라 발원의 기초를 닦는다. 일본에서는 전쟁 수행의 주체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사망하자 그의 정권이 크게 약화되며 2인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등장하여 새로운 바쿠후(幕府)를 창건할 기회를 노린다. 그런 국가의 교체와 정권의 변천은 어찌 보면 전쟁의 결과물로서 당연하다 하겠지만, 문제는 늘 조선이었다.
전쟁이 조선의 땅에서 벌어지고 상상하기도 어려운 인적, 물적 피해를 입었지만 조선은 결코 망하지 않았다. 다른 나라들처럼 왕조와 정권이 바뀌기는커녕 모든 것을 책임질 군왕 선조(宣祖)는 굳건하게 자리를 지켰으며 당파싸움도 여전히 맹위를 떨쳤다. 사대주의(事大主義)라는 굴종의 목줄을 스스로 만들어 아주 흔쾌하게 걸고 다녔던 조선이 아니었던가? 조선을 창건한 이성계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이길 수 없다’며 위화도에서 말을 돌릴 때부터 알아봤지만 설마 이렇게 강인할 줄은 전혀 몰랐었다.
더듬거리며 역사를 공부하던 나는 거대한 사기를 당한 것 같은 느낌에 며칠을 고민하다가 마침내 대전쟁 이전의 일을 파악하기로 결심했다. 애초에 내가 원했던 것은 조선 역사의 중류(中流) 쯤에 존재하는 임진왜란이라는 급류에서 시원하게 레프팅을 즐기는 것이었지만 이제 정반대로 본류를 거슬러 올라가야만 했다. 역사 탐구의 초보자 축에도 끼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리 녹록하지 않았지만 1년 정도의 시간을 쏟아 붓자 어렴풋하게나마 주변의 풍광을 식별할 수 있었다. 거기에서 목격되고 수집된 화석의 파편을 하나씩 짜 맞추고 기워내기 시작한 다음, 대략 3/1 가량 완성된 역사퍼즐그림에 조선과 일본, 여진족과 명나라의 모습이 희미하게 드러났을 때부터 나에게 주어진 시간 진행은 특수상대성이론을 적용시켜야 마땅했다.
조선의 14대 군주인 선조, 그는 그때까지 곤롱포를 입을 수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유일하게 대궐에서 출생하지 못했다. 그의 부친은 군왕의 후궁에서 태어난 사람이었고 어린 나이에 쫓기듯 대궐을 나와야했다. 그의 아들 삼 형제 가운데 막내가 나중에 선조로 등극하지만 동궁(東宮)은커녕 대궐에서 태어나지도 못한 선조가 경복궁을 꿰찰 때부터 역사의 자전축이 비정상적으로 기울게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대전쟁의 최종적인 책임을 져야하는 입장이었지만 그에게서 눈곱만큼의 책임의식 비슷한 것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체면이고 뭐고 간에 싹 몰수하고 다 늙어 낳은 아들인 영창대군을 죽게 만들고 광해군(光海君)마저 보위에서 물러나게 만든 사람이 바로 선조였다. 신하들을 자랑스런 당파싸움에 내 몰아 혁혁한 공을 세우게 만든 사람이 바로 선조였다. 어쩔 수 없는 죽음으로 그 놓치기 싫었던 보위를 물려주게 되지만 선조는 독버섯이 무색하도록 반정(反正)의 포자를 그득히 뿜어내었다.
선조가 뿜어낸 독기에 완전히 오염된 신하들은 그들이 모셨던 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을 들인다. 그러나 인조(仁祖)는 조선 최초로 타국의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드리는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게다가 절을 받는 사람은 조선이 ‘개만도 못한 여진족 오랑캐’라고 폄하하던 족속의 우두머리가 아닌가? 짐승에게 무릎을 꿇은 충격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고 이후의 조선은 웅크리는 반도의 삶이나마 감지덕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들 후손의 D.N.A에 자랑스럽게 포함된 사대주의의 발원은 바로 임진왜란이라는 것이 내 주장이다.
과거에는 갓 쓰고 도포입고 걸어서 찾아갔지만 이제는 양복에 넥타이 차림에 비행기 타고 가는 것이 다를 뿐, 그 발원에서 한껏 자랑스러운 얼굴로 헤엄치는 선조를 생각하면 부관참시(剖棺斬屍)외에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 비열하고 음습한 토양을 걷어내는 것이 나의 첫 번째 작업이었다.

그 전쟁의 진정한 주역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선입견과 피해의식을 걷어내고 관찰하면 그는 진정한 고수(高手)였다. 완벽하게 가진 것이 없는 상태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의 기량으로 일본을 거머잡은 히데요시는 형체가 분명치 않은 바람 같은 사내였다. 정식의 교육과는 철저히 유리되고 오직 실전으로만 이루어진 그의 삶은 일정한 정형을 추구하지 않았다. 눈에 나타나지 않은 비좁은 틈을 파고들어 마침내 함몰시키고야 마는 히데요시의 전술, 눈부시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히데요시의 술수는 당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승복한다는데 더욱 가치가 있었다.
그 일본 불세출의 지략가가 바다를 건넌 것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이룰 것이 없었고 오를 곳이 없음에도 왜, 도대체 그 어떤 것이 그를 파멸의 길로 이끌었다는 말인가? 바다를 가로막은 이순신의 존재는 분명히 부담스러운 것이었지만 그 이전에 바다를 건너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으면 예정된 파멸의 속도를 늦출 수는 있었다. 거기서 얻어진 시간을 최대의 숙적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의 쟁패에 투입하는 것이 당연했다. 지금 간단하게 얻어지는 답안을 당시의 히데요시가 몰랐을 리는 만무할 터, 왜 그래야만 했는지의 비밀은 당연히 밝혀져야만 했다.

누루하치(奴兒哈赤), 대전쟁의 유일한 수혜자인 임진왜란이 발발할 당시 서른 셋에 불과했다. 4년 전인 스물 아홉에 자신이 포함된 여진부족을 통일했으며 대전쟁 초입에서는 그 땅에서는 누루하치를 당할 용사가 없었다. 머지않아 중원을 진동시킬 그의 삶은 저 유명한 칭기스칸을 그대로 빼어 닮았으며 진정한 유목민(遊牧民)의 위력을 보여주었다. 중원에 자리잡은 한족(漢族)의 정주(定住)국가는 바다를 건넌 일본의 위력을 조선으로 흡수하는데 성공했지만 그것이 한계였다. 조선을 구원한다는 것은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껍데기만 남은 피폐함을 여실히 드러내고야 말았다. 통치의 정점에서 나아갈 방향을 지시해야 할 황제는 그저 비루한 욕심을 채우기에 바빴고 명(明)제국은 마침내 만신창이가 된 몸을 눕히기에 이르렀다.
그것을 놓칠 누루하치가 아니었다. 그는 전투에 알맞은 여진족의 특성을 조직적인 것으로 변환시켜 나갔다. 최초의 전투부터 승리는 그의 몫이었고 어느덧, 모든 것을 검증 받는 분기점에 이르게 된다. 누루하치, 그는 사물과 모든 진행의 본질을 알고 있었다. 통일된 유목민의 집단은 자연스럽게 출구를 찾게 되며 그 방향을 잡아주는 것이 그의 의무라는 것, 그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때 마침 그 시기에 동북아시아가 뒤흔드는 대전쟁이 발발했다.
자신의 능력과 연속되는 행운이 따르는 누루하치는 대영웅의 모든 것을 갖추었고 마

목차
죽음 전에 피는 꽃 ... 21
인생 오십 년 ... 53
도약의 노래 ... 101
승리의 의미 ... 123
야수들의 회합 ... 179
반역의 대본 ... 215
균열의 느낌 ... 239
참고자료 ... 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