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여름, 장미축제의 강연회장에서 '나'는 <유혹의 옹호>의 저자 야나키타 구니오의 강연을 듣게 된다. 인류와 문명에 관한 깊은 통찰이 담겨진 그 책을 인상 깊게 읽은 '나'는 장미 축제장에서, 장미 품종연구자로서 강연을 하고 있는 야나키타를 보며, 한 인간에게 두 개의 존재가 함께 깃들여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이 년 전 이른 아침 수영장에서 나오던 한 여자, 검은 눈동자와 가냘픈 어깨를 지닌 곽정을 떠올리는데...
출판사 서평
1. '유혹'이라는 테마로 살펴보는 인간의 존재 양식
3년 만에 신작 《유혹의 형식》을 발표한 엄창석은 작품에 따라 문체를 달리하는 실험적인 작가로 주목받아왔다. 노동 현장을 재현한 같은 작품에는 남성적이고 육질적인 문체를, 이나 《어린 연금술사》에는 여성적이고 감성적인 문체를 썼다. 작품마다의 개별 특성을 중시하는 그는 문체를 작가의 영역이 아닌 작품의 영역으로 돌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에게 소설은 무한하게 열려 있는 세계, 매번 다르게 창조되어야 할 공간이다.
이번에는 섬세한 여성적 필치로 이중의 인격이 공...
1. '유혹'이라는 테마로 살펴보는 인간의 존재 양식
3년 만에 신작 《유혹의 형식》을 발표한 엄창석은 작품에 따라 문체를 달리하는 실험적인 작가로 주목받아왔다. 노동 현장을 재현한 같은 작품에는 남성적이고 육질적인 문체를, 이나 《어린 연금술사》에는 여성적이고 감성적인 문체를 썼다. 작품마다의 개별 특성을 중시하는 그는 문체를 작가의 영역이 아닌 작품의 영역으로 돌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에게 소설은 무한하게 열려 있는 세계, 매번 다르게 창조되어야 할 공간이다.
이번에는 섬세한 여성적 필치로 이중의 인격이 공존하는 젊은 여성의 심리를 그렸다. 제목'유혹의 형식'에는 무질서한 욕망을 일련의 단계로 형식화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담겨 있는데, 유혹 앞에서 망설이는 인물과 유혹을 받아들이게 되는 동일 인물의 변화를 총 2부로 나누어 그렸다. 또 일인칭과 삼인칭 시점의 혼용 등을 통해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안팎에서 들여다보고 그 심리의 표리를 밀도 있게 표현했다.
인간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어떻게 정의되는가, 인간의 의지가 어떻게 사회 속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는가를 질문하는 작가는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아슬아슬한 존재의 줄타기를 통해 결국 현대인의 존재 양상의 실체를 말하고자 한다. 작가에 따르면, 현실은 인간이 만든 공간이지만 그것은 오히려 비인간적인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진정한 자아는 현실에서 일종의 부적응자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아는 그 현실에서 늘 희롱당할 수밖에 없다. 이렇듯 이 작품은 유혹 앞에 노출된 한 여성의 좌절을 통해 유혹과 공포라는 무질서한 인간 본능의 심연을 과감하게 파헤친다.
2. 허물어지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일인칭 개입 삼인칭 소설'의 가능성을 논하는 소설가 '나'는 《유혹의 옹호》라는 책에서 인간의 역사를 시간과 공간에 대한 끝없는 유혹의 과정으로 묘사한 장미 육종가와 얘기를 나눌 기회를 갖게 된다. 그 노학자는 하나의 존재는 단지 하나의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나'에게 한 몸에 두 개의 존재가 깃들 수 있고, 그 존재들이 서로 넘나들지 못하므로 갈등이 생긴다는 깨달음을 준다. 존재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방식으로서의 유혹이 '나'의 화두로 떠오르면서 2년 전 금융센터 수영장에서 맞닥뜨린 단정한 한 여자의 몸에 깃들어 있던 관능미가 시야 가득 펼쳐진다.
도서관 사서인 곽정은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단정함과 퇴폐적인 끼를 동시에 지닌 고교 동창 김하리가 동거를 제안한다. 같은 방을 쓰지만 곽정과 하리의 공간은 그녀들의 취향대로 구분되어 있다. 단정함과 화려함. 두 특성은 물과 기름처럼 다르지만 어느새 서로에게 스며들어간다. 활동적이고 의욕적인 하리에게서 생의 충동을 맛보던 곽정은 하리가 이유 없이 핸드폰만을 남겨둔 채 사라지자 허탈해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하리의 휴대폰으로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되고 점점 하리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하리가 고급 콜걸임을 알게 된 곽정은 그녀를 하리로 오해한 고객에 요청에 따라 하리 행세를 하게 된다. 이러한 충동적 행위는 단순한 일탈을 넘어서 곽정 내부에 깊숙이 잠겨 있는 욕망의 도화선에 불을 지르게 된다. 하리 행세를 통해 하리가 자신인 것 마냥 여기는 곽정은 이중의 자아상을 보이며 점점 더 혼돈의 깊은 나락으로 빠져 들어가는데 .
유혹에 휘말린 가장 대표적인 예로 최초의 여자 이브가 있다. 작가는 이브와 곽정을 동일선상에 놓고 분석한다. 두 사람은 유혹과 그 유혹 너머에 도사리고 있는 공포라는 이중의 굴레에 휩싸여 있다. 이브는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으며, 곽정은 존재와 존재를 가로막고 있던 신성한 막을 찢음으로써 혼란 속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러나 작가는 이렇듯 신성한 막, 신성한 경계선을 찢고 넘나드려는 시도가 존재하는 한 인간의 꿈의 활동은 계속되리라는 전망을 내놓는다.
3. 만남
자유의 뒷면에는 억압적인 커다란 손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한 개인의 심리적인 현상뿐만 아니라 사회 속에 던져진 인간의 경우 역시 그러할 겁니다. 사회 속에 던져진 인간은 그 사회에 대해 어느 정도 자유로운 것 같지만, 정말 자유로운 경우에조차도, 그 사회는 그에게 억압적인 그물을 씌워놓은 상태라는 것이죠. 자유와 억압이 사실상 동일선상에 놓여 있다는 점, 이런 점은 참으로 끔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 엄창석은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문학관, 집필 방식, 작품 기획 의도 등을 밝히고 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면서 문체는 작가가 아니라 개별 작품의 특성이라고 말하며 작품의 성격에 따라 새로운 문체를 실험한다고 고백한다. 영덕 강구에서의 성장기, 그간 발표한 작품들, 영향을 준 작가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엄창석의 작품 세계와 그 형성 배경을 파악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현실에 희롱당하는 존재 자아에 대한 그의 설명에서 《유혹의 형식》에 담고자 했던 집필 의도를 알 수 있다.
《유혹의 형식》을 쓸 때 전개의 실마리를 찾지 못해 쩔쩔 매던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나갔는지를 소개하는 등 작품 집필의 뒷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작품을 쓰는 것은 여행을 하는 것과 같다는 그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행선지인 역사물 쪽으로 다음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저자 소개
작가 엄창석
1961년 경북 영덕에서 태어나 외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영남대 독문과를 졸업했고 대학 2학년 때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80년대 학번으로서 작가의 언어만이 억눌린 현실에서'진정한' 발언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후 1990년에 등단하기까지 무려 8년간의 습작기를 거쳤다. 거듭된 등단의 실패를 겪으면서 다양한 문체를 습득하게 되었고 어떤 소재와 주제가 답답한 현실을 통렬하게 꿰뚫고 나갈 수 있는가에 대해 심도 있게 고민할 수 있었다. 1990년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주물공장의 노동자 문제를 정면에서 다룬 는 당시 노동현장 문학과 순수 문학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2년에 복지 문제를 다룬 장편소설 《태를 기른 형제들》을 중앙일보사에서, 중단편집 《슬픈 열대》를 민음사에서 각각 출간했다. 《슬픈 열대》는 80년대 담론과 후일담 문학, 감성적인 문학이 혼재된 작품집이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2000년에 단편집 《황금색 발톱》과 장편 《어린 연금술사》를 동시에 민음사에서 출간했다. 《황금색 발톱》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갖가지 모순된 정황과 징후를 드러낸 여덟 편의 단편을 묶은 것이고, 《어린 연금술사》는 열두 살 소년의 시각으로 삶의 원형질이 무엇인가를 살피는 자전적 성장소설이다.
그는 등단작에서 최근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사회에 대한 관심을 우회가 아닌 정면에서 맞서는 방식으로 노출시켰다. 정치와 경제 구조, 성, 권력의 형태 등을 두루 작품화했다. 유니크한 주제와 달리 사변적이고 감각적인 문체, 이질적인 상상력으로 재구성된 소재 등의 문학적 방법론으로 인해 작품은 다층적이고 의미론적인 독서의 맛을 제공한다. 그는 주어진 일상을 끌어올려 작품화하기보다 모순된 정황이 교차되는 부분에 시선을 맞추며, 때에 따라 그러한 상황으로 현실을 재구성한다. 그러므로 현장성과 환상성, 시적이거나 사변적인 문장이 한 작품에서 뒤섞여 나타난다. 독서의 울림과 주제를 잘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그는 집필을 하면서 작품의 가독성에 가장 많이 신경을 쓴다. 읽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어떤 의미에서든 흥미로워야 한다는 것, 가능하면 그 흥미가 고급해야 한다는 것에 중점을